탱자가 된 귤 이야기
옛날 어느 마을에 살던 농부 하나가 산 넘고 강 건너 먼 마을로 유람을 떠났다.
이른 나이에 마을 지도자가 된 농부는 산천경치 다르고 물 다른 곳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동안 그 마을이 썩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 봐선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마을이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혈색이 좋고 친절해 농부는 짧은 기간 머무는 동안 어느새 마을의 물색에
흠뻑 반해 버렸다. 농부는 그 마을의 촌장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그 비결 중 하나가
생전 처음 맛본 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기 마을에선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오륀지 귤은 적당히 달기도 하고 시기도 하고
씹으면 물도 많이 나와 농부는 이번 기회에 종자를 얻어가 자기 마을에 보급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다행히 귤 농장의 촌장은 후덕하고 지혜로워서 먼 데서 와서 자기 마을에서도
귤 농사를 한 번 해 보겠다는 젊은 농부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손수 비법을 전수해 주고,
마을의 다른 농부들과 함께 전폭 지원하겠노란 언질도 주었다.
잘 익은 귤과 종자를 품에 안고 싱글벙글 의기양양 자기 마을로 돌아온 농부는
가까이 지내던 이웃을 불러 귤 맛을 보게 한 후 우리 마을에서도 귤 농사를 한 번
해 보자고 설득했다.
그 마을은 전통적인 벼농사를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수원을 할 만한 풍토도
아니었다. 물도 다르고 기후가 달라 거기처럼 귤이 잘 나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었고,
귤 농사를 하게 되더라도 모든 농가가 한꺼번에 하기보다는 일단 시범적으로 몇 집이 해본
다음에 결과를 보고 마을 전체로 확대하자는 말도 있었지만, 귤 맛에 흠뻑 취한 농부가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 있게 나오고 새로운 걸 한 번 해 보자는 용기가 갸륵해 보여
큰 고민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일이라곤 사과와 배밖에 모르던 마을에서 귤 맛을 본 이십여 농부들이 함께
해 보겠다고 나서 사사절(四四節)에 드디어 밭을 갈고 고이 가져 온 종자를 심으면서
귤 농사를 시작했다. 농부는 이참에 마을 이름도 바꾸자면서 귤 마을이란 약간 우스꽝스런
이름을 마을 입구에 크게 써 붙였다.
워낙 뭔가를 새로 해본 적이 없는 조용한 마을에서 귤 농사는 마을의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착착 퍼져 갔다. 원조 귤 농부 격인 촌장도 몇 차례 방문해 격려하고
지원하면서 첫 한두 해는 기대했던 이상의 소출을 거둘 수 있었다. 귤 농사를 도입한
농부는 으쓱해졌고, 곧 이웃 마을들에 소문이 나기 시작해 자천타천으로 귤 전도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농부는 앞뒤 계산을 치밀하게 하는 이가 아니어서 일단 귤 농사를 시작하면
다 잘 될 줄 알고 밀어붙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불철주야
귤 농사를 독려해야 할 농부 자신은 직접 귤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딴 사람들에게만
열심히 하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세 해쯤 되기 시작했을 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귤이 처음 맛본 것과 색깔과 당도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너무 신 맛이
강해 못 먹게 되는 무늬만 귤이 나오기 시작하고, 추수철이 됐는데도 노랗게 되기는커녕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든 귤 나무가 속속 나오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워낙 마을 분위기가 귤 농사 일변도라 불만을 꺼낼 수 없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한밤중에 짐을 싸 소리 소문 없이 다른 마을로 옮기기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안타깝지만 쉬쉬 하고 넘어가 주었다. 귤 전도사 농부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야지, 하면서 애써 모른 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귤 농사를 함께 시작한 농부들은 종자나 농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며 당신이 도입했으니 어떻게 문제점을 개선해 보라고 촉구했지만, 이미 귤 전도사로
각광 받기에 이른 농부에겐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마련해
보자는 농부들의 간절한 열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 네들이 열심히 안 하는 탓이다,
내가 본 귤 농장 사람들은 달랐다는 말과 함께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눈 딱 감고 삼 년만 귤 농사를 전력을 다해 해 보자는
농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마을 사람들은 삼 년이 지나고, 오 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농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극에 달하기에 이르렀다.
이젠 귤 농사만 아니라 농부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냉소적인 기류를 형성하면서, 애시당초 호미로 막을 수 있던 일을 이젠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귤 농사가 도입된 지 오 년이 지나면서 귤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맛을 본 이들은 모두들 떫어하고 지독한 신 맛에 퉤퉤 뱉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에 이르렀다. 마을 원로들은 이 열매가 처음엔 귤이었는데, 황하를 건너오면서
탱자가 됐다고 하면서 원래 농사는 기후와 풍토가 맞아야 하는 법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귤 마을은 귤 농사를 도입한 지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귤이다 탱자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귤 농사에 학을 떼고 넌저리가 난 농부들 가운데는 이젠 귤의 ㄱ자만 나와도
치를 떠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중엔 아예 귤농사를 하지 않는 다른 마을로 집단 이주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도 생겼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쉽사리 옮기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월만 축내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