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동교회 60주년 홈커밍데이
Posted 2014. 10. 21. 00:00, Filed under: I'm churching/더불어 함께
지난 주말 내수동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홈커밍데이를 열어 다녀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처음 인근 내자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한 모교회는 다음해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교회 이름을 바꿨고, 2007년엔 새 예배당을 지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2년 여름부터 형의 전도로 다니기 시작해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줄곧 다니다가
결혼하고 잠실로 분가한 후 89년 어간에 떠났으니 근 20여 년을 다닌 셈이다.
교회가 준비한 프로그램 전에 대학부 동문회가 동문 모임을 열어 내게 진행을 맡겼는데,
모이기 쉽지 않은 토요일 이른 오후 시간대였지만 30여 명이 설레는 심정으로 달려와 주었다.
대전과 대구, 포항은 물론 제주도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독일에 살다가 잠시 온 틈에
참석한 후배도 있었다. 옛날 사진들로 간단한 iPhoto 앨범을 만들어 보여주었고, 많이
부르던 노래 몇 곡을 골라 추억으로 함께 불렀다.
멀리서 온 한두 명과 고참 선배 몇만 소개하려다가 서로 근황도 궁금할 것 같아 모두에게
1분씩 자신을 소개하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듯이 대학부 이후의 개인사를 짧게들 수를 놨다.
몰라보게 달라진 외모에 서로 놀라고,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 목회를 하고 있다길래 아니 네가,
어떻게(어쩌다가), 하면서 놀리(라)기도 했다.^^ 허름했던 내수동 옥탑방 다락방이
저리 훤하게 리모델링된 것에도 모두 깜놀.
대학부 이후 남아 있는 친구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교회를 떠나
여기저기로 많이들 흩어졌다. 일종의 숙명 같은 흩어짐은 교회사의 오픈 시크릿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대학부 증인들도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5년에 신복윤 목사님에 이어 부임하신 박희천 목사님은
23년간 담임목사로 교회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은퇴해 원로목사로 계신데, 올해로 미수
(米壽, 88세)를 맞으셨다. 여전히 정정하신 목사님은 강단에서 정말 반갑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모두를 환영해 주셨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시면서 30여 년이 흘렀는데도
이름은 물론 개개인과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시는 놀라운 기억력은 여전하셨다.
교회 60년을 책으로 어떻게 정리했나 궁금했는데, 일반적인 연대기 형식의 자료집이
아니라 잡지책 크기인 46배판 160면 정도의 컬러 매거진 형태로 잘 만들었다. 나도 70년대
후반 대학부 성장과 관련된 글을 청탁 받아 한 꼭지를 기고했다.
우리 다닐 땐 밀라노와 보인상고도 지나야 했고, 교회 가는 골목은 몇몇 음식점만
있었을 뿐 한적한 주택가였는데, 아파트 단지와 빌딩들,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우리가
누비고 다니던 추억 속 풍경과는 시공간적으로 적잖은 거리가 생겼다. 그래도 이 골목을
다시 걸어보고, 추억을 공유하던 선후배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래 사진은 79년 대학부 여름수련회에서 단체티셔츠를 입고 찍은 것이다.
끝나고 1954년에 처음 인근 내자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한 모교회는 다음해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교회 이름을 바꿨고, 2007년엔 새 예배당을 지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2년 여름부터 형의 전도로 다니기 시작해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줄곧 다니다가
결혼하고 잠실로 분가한 후 89년 어간에 떠났으니 근 20여 년을 다닌 셈이다.
교회가 준비한 프로그램 전에 대학부 동문회가 동문 모임을 열어 내게 진행을 맡겼는데,
모이기 쉽지 않은 토요일 이른 오후 시간대였지만 30여 명이 설레는 심정으로 달려와 주었다.
대전과 대구, 포항은 물론 제주도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독일에 살다가 잠시 온 틈에
참석한 후배도 있었다. 옛날 사진들로 간단한 iPhoto 앨범을 만들어 보여주었고, 많이
부르던 노래 몇 곡을 골라 추억으로 함께 불렀다.
멀리서 온 한두 명과 고참 선배 몇만 소개하려다가 서로 근황도 궁금할 것 같아 모두에게
1분씩 자신을 소개하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듯이 대학부 이후의 개인사를 짧게들 수를 놨다.
몰라보게 달라진 외모에 서로 놀라고,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 목회를 하고 있다길래 아니 네가,
어떻게(어쩌다가), 하면서 놀리(라)기도 했다.^^ 허름했던 내수동 옥탑방 다락방이
저리 훤하게 리모델링된 것에도 모두 깜놀.
대학부 이후 남아 있는 친구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교회를 떠나
여기저기로 많이들 흩어졌다. 일종의 숙명 같은 흩어짐은 교회사의 오픈 시크릿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대학부 증인들도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5년에 신복윤 목사님에 이어 부임하신 박희천 목사님은
23년간 담임목사로 교회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은퇴해 원로목사로 계신데, 올해로 미수
(米壽, 88세)를 맞으셨다. 여전히 정정하신 목사님은 강단에서 정말 반갑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모두를 환영해 주셨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시면서 30여 년이 흘렀는데도
이름은 물론 개개인과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시는 놀라운 기억력은 여전하셨다.
교회 60년을 책으로 어떻게 정리했나 궁금했는데, 일반적인 연대기 형식의 자료집이
아니라 잡지책 크기인 46배판 160면 정도의 컬러 매거진 형태로 잘 만들었다. 나도 70년대
후반 대학부 성장과 관련된 글을 청탁 받아 한 꼭지를 기고했다.
우리 다닐 땐 밀라노와 보인상고도 지나야 했고, 교회 가는 골목은 몇몇 음식점만
있었을 뿐 한적한 주택가였는데, 아파트 단지와 빌딩들,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우리가
누비고 다니던 추억 속 풍경과는 시공간적으로 적잖은 거리가 생겼다. 그래도 이 골목을
다시 걸어보고, 추억을 공유하던 선후배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래 사진은 79년 대학부 여름수련회에서 단체티셔츠를 입고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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