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다음날 아침을 먹는 방법
Posted 2010. 9. 23. 10:05, Filed under: I'm wandering/百味百想추석 연휴 첫 이틀을 본가와 처형네서 보내고 저녁 나절에 밀리는 도로를 겨우 헤치고 돌아왔다. 몸은 찌뿌둥 늘어지는데다, 음식 장만하느라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둔 사이에 들어온 모기에 물려 제대로 못 자고 코감기를 얻어 왔다. 라면으로 저녁을 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에 깨다 자다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선선한 아침 기운에 잠이 달아났다. 아침 생각이 없어 커피를 내리다가 냉장고에 있는 두부 생각이 났다. 연휴 전날 아래층 아주머니가 공장에서 만들어 막 가져온 두부 한 판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내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반은 본가에 가져가고 한 모씩 사각 락액락에 물에 담가 두었는데, 두부 지짐이를 해먹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두껍게 세 쪽을 썰어 프라이팬에 기름 둘러 부쳤다. 양념장을 하려면 아내를 깨워야 하기에 냉장고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쌈발(Sambal) 쏘스. 인도네시아에서 사온 게 남아 있었다. 뭐, 두부야 맨입으로도 먹고, 양념장도 일종의 쏘스니까, 이렇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긴 건 딱 케찹인데, 케찹보다는 신맛이 덜하고, 고추장보다는 매운맛이 조금 덜한 시고 매콤한 맛으로, 원래는 볶음밥 같은 데 넣어 먹지만, 창발성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두부 부친 것을 세 등분해 쌈발 쏘스에 찍어 먹으니, 예상대로 나쁘지 않다. 일단 간이 되니까 먹을 만 했다. 실패할 가능성도 있어 소심하게 조금만 짜 놓았는데, 두 쪽을 먹으니 금세 없어졌다. 더 덜어 먹을까 하다가, 마지막 한 쪽은 반찬 없을 때 밥에 비벼 먹기도 하고 뿌려 먹기도 하는 파래김자반볶음을 덜어 찍어 먹기도 하고 올려 먹기도 했는데, 둘 중엔 이게 판정승.
오랜만에 아침 메뉴가 된 두부 지짐이는 추억의 음식이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60년대만 해도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집안 제사나 잔치 때만 상에 올라오고, 그것도 일가 친척이 함께하는 식사에선 상석의 어른들 몫이었다. 제일 어린축에 속했던 나나 사촌 형제들에겐 죽여주는 냄새만 돌아올 뿐 반쪽 크기 두부 지짐이 한 장이 고작이었는데, 이게 고기맛 못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로 큰 걸 차지하겠노라고 젓가락 싸움에 급기야 말싸움 끝에 승자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한 입에 집어넣고 어기적거리고, 진 놈은 울며 뗑깡 부리다가 보다 못한 어른들이 옛다, 하고 넌즈시 던져주시는 산적 고기 한 점에 횡재라도 한 듯, 닳도록 씹으면서 뻐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게 풍요로워져 평소 그 존재가치나 맛에서 한참 밀린 게 두부지만, 명절 다음날 아침 메뉴로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종종 아래층에 한 판 주문해서 아침 메뉴에 올리고, 주말 내 당번 때 두부 요리 원 없이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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