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큐티를 넘어서
Posted 2011. 2. 1.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숨어있는책, 눈에띄는책지난호에 이어 이번 달에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간직하고 있는 신흥 고수를 선보일까 한다. 이번에는 외국 저자가 아닌 국내 저자인데, 다른 분야가 아닌 신앙생활의 기초 중의 기초를 이루는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함께 다루고, 나온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존재감이 별로 부각되지 않고 숨어 있는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말씀묵상기도』(스텝스톤, 2010)란 제목은 다소 밋밋하고 크게 새로울 게 없어 보이며, 이경용이란 저자도 이름이 생소하고, 스텝스톤이란 영어로 붙인 출판사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여러 모로 눈에 안 띌 만했는데, 숨은 보석이었다.
스텝 스톤은 도서출판 예수전도단의 영성․지성․인성 계발 전문 브랜드인데, 그러고 보니 지난호에 소개한 토니 존스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쓴 『하나님을 읽는 연습』도 예수전도단에서 나왔다.
저자는 소망교회 부목사로, 토론토대학과 풀러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했다.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대한기독교서회, 2010) 등 세 권의 책을 냈다지만, 널리 알려진 목회자, 영성가, 저술가는 아닌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이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결론부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음에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니, 묵상하는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말씀을 묵상하고 쪼개지만, 말씀이 나를 쪼개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려면 큐티를 넘어서 관상적 큐티로 나가야 한다. (206면)
시나브로 큐티를 생활화 하고 있는 개인과 한국교회를 향한 점잖지만 통렬한 비판이었다. 큐티 전문지를 만들고, 큐티 사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에서 큐티가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관상적 큐티는 뭘까?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큐티와 뭐가 다른 걸까?
저자는 큐티는 말씀묵상으로, 관상적 큐티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 말씀묵상기도라고 부른다. 물론 큐티할 때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지만, 저자가 말하는 기도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서 말하는 관상적 기도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1-12세기에 활동한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사 귀고 2세(Guigo 2, ?-1118)이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란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 <관상생활에 관한 편지>(이 책의 부록 2에 전문 수록)로 영성가들 사이에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는 중세 말기에 많은 수도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서신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 수도사들이 추구해야 할 영적 과정을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에 맞닿은 네 칸 짜리 사다리를 한 칸씩 오르는 것에 비유했다.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는 렉시오 디비나, 즉 말씀묵상기도의 틀이 되었다(72-74면).
저자는 서문과 1장에서 한국 교회의 기도 트렌드가 집단과 군중에서 개인으로, 부르짖는 통성기도에서 잠잠한 침묵기도로, 현안 중심의 간청하고 청원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머무는 관상기도로 변화하려는 조짐이 보인다고 지적하는데, 동의하든 안 하든 경청할 만한 지적이다.
또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는 능동적인 기도가 기도의 전부가 아니라, 좀 더 깊은 기도를 하려면 수동적인 기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9면). 무엇이든 열심을 강조하는 우리네 풍토에서 수동적인 기도는 어색해 보이고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책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요란하기만 하고 뭔가에 들떠 있는 작금의 한국 교회의 부족한 2%를 채우는 대안으로 색다른 매력과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1부는 말씀묵상기도가 무엇인지, 2부는 하늘에 맞닿은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르면서 관상적 큐티를 하는 법을, 3부는 이러한 큐티를 위한 내적․외적 준비를 다루고 있다. 부록 1은 1박2일 또는 2박3일간 리트릿을 가서 말씀묵상기도를 하는 시간표와 가이드를 제공하며, 부록 2는 귀고 2세의 편지 전문을 수록했다.
전체적으로 신자들의 삶과 관련된 예를 많이 들고 있고, 설명하고 주장하기보다는 설득하고 권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하게 만든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귀고 2세)
'I'm journaling > 숨어있는책, 눈에띄는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석 생각 (0) | 2011.03.19 |
---|---|
존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제자도 (3) | 2011.02.25 |
신흥 고수의 출현 (1) | 2011.01.09 |
Grace Yancey (7) | 2010.12.14 |
부활을 살고 계십니까? (0) | 2010.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