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눈폭탄
Posted 2013. 12. 28.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내려오는 길에 후두두둑 눈발이 치기 시작했다. 사인암에서 산 아래를 내려볼 때 흐린 날씨긴
했어도 눈 기운은 못 느꼈는데, 불과 10분도 안 지나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더니 눈으로 변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걸 사진으로 담긴 쉽지 않다. 하얀 눈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솜 뭉치 정도는 돼야 잡히는데,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정도로는 디카에 잡히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즉통이라고, 마침 까만색 폴라폴리스 자켓을 입고 있는 나를 찍어보니 눈발이
잡히기 시작한다.
굵어진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조금 더 내려오니 땅바닥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고 나무 기둥에도
앉기 시작했다. 별 표정 없이 무료해 보이기만 하던 겨울산이 갑자기 막 옷을 갈아 입으면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사인암까지 오르는 동안 별로 눈에 띄는 게 없어 사진 한 장 안 찍고 그냥 내려왔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온 게 고마워서인지 내려가는 중간쯤에 거저 가지 말라며 눈 내리는 풍경을 선사해
주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온몸으로 맞는 눈은 거실이나 사무실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것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내려왔을 땐 자켓엔 눈이 덮이기 시작하고 면바지는 젖기 시작할 정도로 눈발의 공세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앞서가던 이들도 걸음을 재촉했던 듯, 계단길엔 등산화 자국이 선명했다. 막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올라오는 자국은 아직 찍히지 않았다. 어쩌면 막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오늘은 글렀다며 발걸음을 돌렸거나 점심 때인지라 근처 보리밥집
창가에 앉아 근사한 설경을 즐기면서 밥 한 술 뜨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꼭 눈폭탄 맞은 것 같은 행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발이 목으로 들어올까봐 지퍼를
잔뜩 올리고 턱을 집어 넣고는 눈도 반쯤 감고 서둘러 내려왔는데, 사진은 그런 황망함까지
잡아내진 못한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자켓을 벗이 눈먼지를 털어내고 눈발 보습샴프도 맨손으로 앞뒤로
털어내면서 상기된 표정으로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데,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그치면서
멀쩡한 연말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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