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 슬쩍 내리다 만 서리
Posted 2016. 1. 12.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행
올 겨울은 언제 아이젠을 신었나 싶을 정도로 산길 사정이 좋은 편이다. 물론 천 미터가
넘는 깊은 산에서라면 윗쪽에선 착용해야 했겠지만, 동네산들은 눈길이 되거나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질 일이 별로 없었다. 배낭이나 주머니에 갖고 다니긴 해도 막상 꺼내 신을 일이 몇 번
안 됐다. 등산화에 끼우고, 조심해서 걷고, 내려와선 빼서 털고 말려야 하는 불펀함이 준 건
좋은데, 설경을 본다거나 풍경이 별로 달라지는 일이 안 생겨 조금 심심하긴 하다.
역시 겨울엔 눈이 좀 내려야 제맛인데, 엊그제 새벽 검단산엔 눈 대신 서리가, 그것도
조금 내리다 말았다. 서리도 제법 많이 내리거나 기온이 떨어질 때면 눈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흰색 풍경을 이루는데, 어째 스리 슬쩍 눈꼽만큼 내리다 만 모양새였다. 겨우 오솔길
같은 한적한 등산로와 바위 틈새에 흔적만 남겼다. 그나마 다른 이들이 밟고 지나가기 전이어서
형체가 남아 있지,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녹아 없어지거나 밟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도 정상 가까운 헬기 표시 지점엔 H자가 돋보이도록 살짝 덮고 있었고, 정상엔
맨땅보다는 서리라도 밟으면서 등정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다른 데보다 조금 더 인심을
썼는지 언뜻 백설 가루를 넓게 뿌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침 산 위에서 밤을 보낸듯한
노란색 일인용 텐트가 일출에 앞서 서리 내린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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