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진홍 생각
Posted 2011. 5. 10.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Articles1995년 3월부터 2004년 1월까지 <복음과상황>은 내 일터였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측할 순 없지만, 한창때인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을 월간지 편집자로 보냈으니 여러모로 거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올해로 복음과상황은 창간 20주년을 맞았는데, 그 기념으로 창간후 오랫동안 공동발행인으로 수고한 네 사람의 삶과 글을 조명하는 단행본을 내기로 했다. 원래는 다른 참신한 기획이 준비되었지만, 일정이나 재정 등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내가 수정 제안했다.
김진홍, 손봉호, 이만열, 홍정길 4인 가운데 나는 김진홍 목사가 쓴 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리뷰하는 코너(30매)를 맡게 되었다. 이 글이 실릴 단행본은 복음과상황 6월호를 대신해 발행되어 독자들에게 배달된 후 단행본으로 계속 팔리게 된다고 한다.
설교에 요구되는 네 개의 부사
"쉽게, 즐겁게, 깊게, 변하게"(김진홍 목사의 설교론 연재 칼럼)
지금은 꼭지가 없어졌지만, <김진홍 생각>은 1991년 <복음과상황> 창간 이후 십여 년 가까이 오래 연재되던 인기 칼럼이었다. 단순히 공동발행인 한 사람이 쓰는 가벼운 신변잡기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 교회와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지도자가 쓰는 설교식 이야기는 이 딱딱한 잡지에서 비교적 쉽게 읽히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읽을거리였다. 느릿느릿하면서도 에둘러 가지 않고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 설교를 풀어 쓴 그의 칼럼은 1990년대, 그러니까 「복음과상황」 20년의 전반기 노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정 꼭지였다.
메신저, 커뮤니케이터, 운동가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했지만, 비교적 독서량이 많았고 새로운 흐름이나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그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데다가 책 많이 읽고 사람 많이 만나니 글감이 풍성해질 수밖에 없고,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다양한 인생 경험은 늘 이야기 소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청계천과 남양만에서의 독특한 사역이 입소문을 타면서 한동안 그는 유명 인기 부흥 강사로 국내외를 다녔는데, 내용을 떠나 그의 구수한 이야기 설교에 청중은 매료되었고, 청중 동원력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으면서도 우매한 청중을 쥐락펴락했던 전형적인 부흥사들 같지도 않고, 무미건조하게 낡은 레코드 돌리는 듯한 전통적인 장로교 설교를 벗어난 입말 투의 구수한 메시지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괜시리 무게 잡으려 하거나 별로 잰 체 하지 않는데다가 시장통의 언어를 마다하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이해하고 경청할 수 있는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목회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활약하던 시기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들을 때만 달콤한 당의정 설교가 아니라, 바로 살아보자며 개혁을 부르짖고, 통일한국을 꿈꾸면서 북한과 중국 동포들을 돕고, 다음 세대를 위해 인재를 키우자는 호소에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전성기 때 우편으로 받아보는 그의 테이프 설교 판매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매주 최소 몇 만 번의 클릭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이 점은 자기 교회 언저리(나와바리^^)에서만 통하는 동시대의 내로라하는 유명 목회자들의 메시지와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휘갈겨 쓰기를 좋아했던 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답게 일단 펜을 잡으면 거의 막히지 않고 몇십 매의 원고를 앉은자리에서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늘 잡지 마감을 앞두고 촉박하게 보내오는 그의 손글씨 원고를 타이핑해야 했지만(해외에 자주 갔기 때문에 종종 팩스로 30장이 넘는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 필자로서 일정한 기대와 수준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막힘이 없이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고,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기에 비교적 급진적으로 보였던 복상의 논조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발행하는 잡지라서 구독하는 중장년층 팬들과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이 꼭지를 즐겨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세대(1941년생)로선 말로 하는 설교와 글로 쓰는 설교를 함께 구사할 줄 아는 흔치 않은 인물이었는데(인터넷 시대가 된 지금도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태반이다), 자연히 청중과 독자와 소통할 줄 아는 메신저(messenger)였다.
아주 화려하거나 세련되진 않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하게 하고 싶은 말을 설교와 글로 자연스럽게 쏟아낼 수 있었고, 투박해 보이면서도 군데군데 자유롭게 문자를 구사하고 나름의 논리에 설득력이 있어 가볍거나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하고 글로 멋지게 썰(說)을 풀 수 있는 타고 난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였다.
화려한 달변가나 대단한 문장가가 아니면서도 그의 설교와 글은 듣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그를 통해 비전을 갖게 되고 삶의 방향을 바꾼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운동가(transformer)가 지녀야 할 자질과 미덕을 고루 갖춘 이였다.
네 개의 부사로 풀어 쓴 설교론
그의 수많은 칼럼 가운데 “쉽게, 즐겁게, 깊게, 변하게”는 복상이 창간된 지 5년이 지난 1996년 3월호(통권 52호)부터 6월호까지 4회에 걸쳐 분재된 그의 설교론이다.
50대 중반의 한창 주가를 날리던 시기에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 설교의 문제점을 간단하게 짚으면서 그렇게는 답습하지 않겠다는 설교자의 준비와 다짐이랄까 마음가짐을 다룬 글이다. 한 마디로 자신은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고 전한다는 그의 설교 철학을 정리한 글이다.
학술적 용어나 현학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단 네 개의 간단명료한 부사로 설교와 설교자의 자세를 표방해 설교 공급자들에겐 각성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면서, 설교 수요자 또는 소비자인 청중의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고 있다.
그 정도 레벨의 설교가의 설교철학이라기엔 너무 단순해 보이고, 얼핏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는 작심하듯 설왕설래, 왈가왈부를 피하면서 자신과 동료 설교가들을 향해 정공법을 취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그가 보여준 뜻밖의 행보로 인해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이 어수선해졌고 저평가되고 있지만, 이 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요긴한 내용을 담고 있다.
1. 쉽게
“왜 설교를 저렇게 어렵게, 힘들게 해서 듣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하는 걸까?” 하는 설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고민은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숱한 설교를 듣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물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도 처음부터 쉽고 재미있는 설교를 한 건 아니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서른 살에 들어간 청계천 빈민촌 생활은 그를 여러 가지로 바꿔놓았다.
껌장사 하고 막노동 하던 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생각과 버릇, 말과 행동을 배우고, 그들이 쓰는 말, 경상도식 표현으로 ‘이바구식 설교’를 하면서 비로소 쉽고 신명나게 말하는 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고상한 말만 하거나 자기 자신도 못 알아듣는 설교, 듣는 교인들이 진이 빠지고 지겨워지면서 멀어지게 만드는 설교가 아니라, “좌우지간 알아듣기 쉽게 하자”는 게 그의 설교 첫 번째 원칙이다(3월호).
2. 즐겁게
신앙의 세계에는 품위와 상식이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당도 품위 있고 즐거운 분위기여야 한다는 그의 소신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즐겁고,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즐거워야 한다는 두 번째 기준을 낳았다.
그가 생각하는 교회는 모름지기 신랑 예수를 모시고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는 축제마당, 잔칫집 같은 곳이다. 그런데 예배시간이나 집회시간에 공연히 무겁게 만들거나 울음바다를 연출해 초상집이 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말씀을 제대로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이 주는 즐거움을 맛봤던 예로 느헤미야 8장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제대로 준비되고 전해지는 설교를 통해 말씀을 밝히 배우고 그 깨달음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고 나누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생활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3-4월호).
3. 깊이 있게
그런데 설교가 쉽고 즐겁긴 한데 막상 깊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설교다운 설교가 될 수 없고, 잘못하면 만담이 되거나 우스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목회활동, 그리고 설교할 때 일관되게 강조하는 세 번째 원칙으로 ‘깊이 있게’를 든다.
그는 한국교회가 그저 병 낫고 복 비는 신앙에다 교회당이 커지고 교단이 넓어지는 일에만 열중하는 양적 성장에만 치중했다면서, 지금까지처럼 많은 회중 앞에서 웅변식으로 하는 설교보다 교인 한 영혼 한 영혼을 보살피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교자는 교회성장(Church Growth)보다 교인성숙(Christian Maturity)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를 위해 “설교에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항상 있을 것이로되, 그 중에 제일은 깊이이니라.”라고 특유의 조크를 덧붙인다(4-5월호).
4. 변하게
마지막으로 그는 오늘날 설교자들 중에는 교인들로 하여금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면서, 그 원인으로 설교자 자신이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 진단한다.
설교자 자신이 계속 자라지 않으면서, 자기쇄신(Innovation) 없이 입으로만 하는 설교는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온 삶이 뒷받침되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자기쇄신이 뒤따르지 않는 설교자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침체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도 침체시킨다는 지적은 목회자라면 아프지만 귀담아들어야 할 잠언이다(6월호).
문제의식 넘어서기
그의 이 글이 쓰여질 때만 해도 설교나 설교자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는 금기시되고 건드려선 안 되는 성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후 지난 10여 년 사이에 설교비평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쓰고 책도 나오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강단과 설교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철옹성이고, 내부자는 물론 국외자들의 왈가왈부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영역이고, 각자 자기 소견과 취향대로 준비하고 전하는 사사 시대를 솔직히 못 벗어나고 있다.
이 말은 개별 설교자에 대해 바깥에서 시비를 걸거나 돌을 던지는 게 나름 의미가 있고 작은 파장을 불러올 수는 있겠지만, 한국교회 강단 설교 문제점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과 해결 전망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유명한 설교자 한 사람이 자신의 설교 철학을 대중적인 글로 피력함으로써 이 문을 열고, 스스로 문턱을 낮춘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그의 설교가 이 원칙들을 늘 유지하느냐는 듣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설교를 준비하고 전할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는 효과는 충분히 있었으리라고 사료된다.
그가 사용한 부사 네 개는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민하게 만드는 이상이고 로망이기도 했지만, 기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어렵고, 무겁고, 얄팍하고, 구태의연한 수많은 설교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회중의 내재된 불만, 잠재된 필요에 다름 아니었다.
30매씩 네 달에 걸쳐 쓴 120매 정도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의 다른 칼럼들이 그랬듯이 이 글도 광범위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쉽고 편하게 쓴 글이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예시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 구절을 길게 풀어 설명하기도 하고, 자신이 경험했던 사례들을 이야기하듯 길게 예로 들고 있다.
아마도 논문이나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면 그 절반 또는 반의 반 정도로 줄여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지면은 절약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이 재미없어진다. 다소 체계가 없고, 중언부언하는 듯해도 김진홍 생각은 그런 맛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했고, 사랑받았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어떤 설교가들은 좀 더 일찍 은퇴해 주는 게 본인과 회중에게 도움이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설교가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벌써 은퇴냐며 아쉬움을 느끼게 만든다.
다른 건 논외로 치더라도 설교와 설교가로서의 그의 은퇴는 아쉽다. 한때 그의 테이프 설교를 즐겨 들었던 청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이야기 설교식 칼럼을 잡지에 실었던 편집자이자 독자였던 사람으로, 타고 난 스토리텔러(Storyteller)이자 이야기꾼인 그의 은퇴가 목회 일선에서는 한 발 물러나지만, 쉽고 즐겁고 깊이 있고 변하게 하는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고 글로 풀어내는 일에서 만큼은 은사에 경륜이 더해져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좀처럼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국교회 강단의 변화를 끌어내는 데 사용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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