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지만 어쨌든 많이 회자되는 영성 [긴 글]
Posted 2011. 1. 6.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Articles간만에 논문 한 편 썼다. 지난 가을 대전에 있는 침신대신학연구소에서 2010년 연구출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독교 영성, 더 깊고 넓게>를 낼 계획이라면서 10편의 논문 중 하나를 쓸 수 있겠느냐는 메일을 받았다. 나를 빼곤 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필진으로 참여하는데, 평신도가 생각하는 한국기독교영성을 맡아 달라는 요청에 평소 관심 있는 주제라 덜컥 하겠노라는 답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집필 기간 석 달에, 논문 형식으로 각주를 포함해 A4 12-18쪽 분량의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조금 버거웠지만, 생각 나는 대로 메모해 두었다가 마감에 박두해 12월 마지막 주간부터 일주일 정도 매달렸다.
칼럼이나 간단한 리뷰만 쓰다가 형식을 갖춘 글쓰기를 하려니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내 식대로 주제를 전개했다. 각주도 20개 정도 달았는데, 본문의 분량도 꽤 되거니와 Ctrl-C해서 Ctrl-V했더니 각주 부분은 카피되지 않아 본문만 싣는다(각주에 괜찮은 정보와 자료가 많은데..). 그래도 블로그 글치곤 양이 무지막지해 간만에 스크롤 압박들을 받을 것이다.
써 놓고 보니 역시 내 스타일의 글이 되었다. 길지만 지루하게 읽히진 않는데, 논문다운 격이랄까 진지함이랄까 무거운 맛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꼰대들이 달래 꼰대가 아닌 모양이다.^^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많이 회자되는 영성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 이제 다시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가장 참신하고 현대적인 접근”
“오염된 언어로 왜곡된 영성으로부터의 회복”
“기독교 영성 회복의 일곱 가지 길”
“깊은 열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실제적인 62가지 영성 훈련 지침서!”
“일상적 영성 중심부에 맞닿는 깊이 있는 묵상”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
내 사무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영성 관련 책들의 앞뒷면에 큰 글자로 적어 놓은 소개 문구들이다. 이 책들을 읽고 이대로만 될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 탁월한 영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바라면서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 왔던 영역에서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10권 아니라 100권이라도 기꺼이 사서 읽을 용의가 있다.
그런데 현실은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한다. 영성에 관해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언제부터인지 중단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은 동기를 유발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잘못된 방법을 개선하고, 무엇보다도 이제부터는 확실히 훈련에 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개중에 어떤 책은 정말 잘 써진 책인데 독자들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고 묻혀 있는 것 같아 영성 관련 추천서로 선정하고픈 마음도 든다.
그러나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가 현대의 고전이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잘 설파한 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다르듯이, 영성을 실천하는 것과 영성에 관해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영성이 있고, 영성의 향기를 드러내며,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영성에 관해 말만 하거나 기껏 변죽만 울리다 마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성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영성이 자라고 몸에 배게 할 수 있는지 눈에 확 띄고 손에 꽉 잡히는 맞춤 식 모범 답안이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애매모호한 영성
목회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일반 성도들에게 ‘영성’(spirituality)은 그 뜻을 정확히 말하기도 어렵고, 전보다 늘어나긴 했지만 사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한국교회 신자들 사이에 별로 즐겨 쓰는 말도 아니다. 뭔가 매력과 향기가 있는 것 같고 중요한 말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도 자세히 가르쳐 주지도 말해 주지도 않는, 그래서 약간 관심을 가져보다가 이내 깊이 생각해 보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 같다.
제자도(discipleship)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바로 동일시하기에는 뭔가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이고, 성령의 열매를 위시한 영적 성품(spiritual character)과 흡사한 부분이 있지만 역시 그대로 대입하기는 곤란해 보인다. 영성이 깊은 이들이나 오랜 연구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어쩌면 객관적이고 통일된 정의는 뒤로 미루고 그저 편하게 갖다가 대충 또는 자기 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말이 된 것 같다.
이렇듯 영성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모호한 개념 중 하나이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시중에 나와 있는 기독 서적들 가운데 제목에 영성이 들어가 있는 책이 줄잡아 수십 권이 넘지만, 그리고 이 책들이 저마다 영성을 쉽게 정의하고 실제적인 노하우를 들려주는 것 같지만, 여전히 영성의 개념은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최소한 관련된 책을 두세 권 읽으면 영성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이 잡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또 신앙의 연륜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영성도 자랄 것으로 기대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인 훈련과 관련한 주제나 제목들에서 생각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영성 목회, 영성 훈련, 영성의 기초, 영성 개발, 목회 영성, 묵상과 영성, 기도와 영성, 되찾은 영성, 깊은 영성, 영성 길라잡이 등 영성이란 말이 안 들어간 데가 별로 없을 정도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책뿐만 아니라 영성 관련 세미나도 유행하고 있으며, 기도원이나 수양관 이름에도 영성을 붙이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기존의 교회 프로그램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꾸준히 수요를 창출하고 있지만, 막상 영성을 알기 쉽게 한두 문장으로 정의해 보라면 여간해선 속 시원한 답을 듣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솔직히 어쩌면 그 말을 사용하는 이들도 그 뜻을 제대로 모르면서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영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
오늘날 어느 교회든 찾아가서 아무나 붙잡고 영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답을 위시해서 물어본 숫자만큼의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목회자들도 모르긴 해도 저마다 정의를 달리할 것이며, 평신도 중직자들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또 그럴싸한 대답을 하는 이가 있더라도 누구나 수긍할 만한 정의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시나브로 영성이란 단어는 많이 사용하는 유행어가 됐지만, 정작 영성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엉성하고 산발적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 범주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영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인다.
1. 영빨 또는 수련회 영성
전문용어는 아니지만 한국교회 성도들 사이에 널리 쓰이는 말 가운데 ‘영빨’이 있다. 그 사람 참 영빨 있다, 영빨 좋다 등으로 뭔가 화끈하고 열심이 있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믿음의 실체가 있어 보일 때 사용되면서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신앙용어로 통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영빨은 특히 수련회나 부흥회, 신년특별새벽기도회 등 신앙생활의 중요한 이벤트를 전후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치 비어가는 기름 탱크를 주유소에서 충전하듯이 수련회나 각종 집회를 다니면서 은혜를 받으면 일반적으로 영빨이 충만해졌다고 하고, 대부분 이것을 영성의 실체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강력한 회심과 회개를 경험했다든지, 가시적인 은사를 받게 됐다든지, 뭔가 전과는 다른 차원의 믿음을 갖게 되고 그러한 신앙 행위를 보일 때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쓸 때 화끈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격이 떨어지고 자칫 천박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왠지 영험(靈驗)하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기독교 신앙보다는 무속 신앙에 가까운 용어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영성은 영빨과는 달리 다소 점잖아 보이고, 거룩해 보이며,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는 점에서 너도 나도 선호하는 용어가 됐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분명치 않고, 그 함의 또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됐다.
이러한 영성 또는 영빨의 문제점은 계속 수련회나 집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일정 간격으로 충전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수련회 참석해서 은혜 받고 변화된 모습이 장기간 유지되면서 오래 가면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작심삼일까진 아니어도 그리 길게 지속하지 못해 계속해서 다른 수련회와 집회, 그것도 좀 더 센 걸 필요로 하기 쉽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 소위 열심 있는 대학생들은 여름 겨울방학을 온통 수련회, 단기선교, 각종 봉사와 훈련 프로그램으로 채우면서 영성을 추구하는 수가 있는데, 어느 정도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면서도 많은 경우 열심과 에너지가 소진되는(burn-out) 현상을 낳아 개인적으로도 힘들지만, 자신이 소속했던 공동체에도 부담을 주기도 한다.
영빨을 높이기 위한 이러한 단기간의 영적 과식은 신앙생활에서 약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장년층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때 말씀이 좋다거나 은사와 치유가 일어나는 집회를 찾아다니면서 영성을 키운다는 이들이 있었는데, 본교회는 적만 두고 별미를 찾아 헤매는 불균형, 비정상에 가까운 모습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이런 영성은 실체와는 다른 가식적, 장식적 영성으로 전락하기 쉽다.
2. 수도원적, 은둔적 영성
영빨이 가시적이고 적극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내면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영성으로 이해하는 다른 일각에서는 영성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아닌 일정 기간 한적하고 외부로부터 차단된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과 기도 등 평소와는 다른 수행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은둔적인 형태를 추구하기도 한다.
사막 교부들이나 중세 수도원에서의 침묵(묵언)과 고행, 금욕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뭔가 신비스럽고 은둔적인 성향을 영성 훈련의 기초로 삼는 경우이다. 이들은 기도도 침묵 기도와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선호하며, 말씀 묵상도 단순한 QT가 아닌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식의 좀 더 많은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즐겨한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많이 하는 피정(避靜)을 개신교 방식으로 도입하고, 비움과 나눔을 강조하고 관상 훈련과 공동체 생활을 중시한다.
바쁘고 건조하며 프로그램 지향적인 현대 교회에 이런 고전적인 방식을 통한 영성 훈련과 수련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이를 통해 기존 프로그램을 보완할 필요가 있지만, 문제는 바쁘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영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역시 특별한 결심을 하고 특별한 시공간을 만들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훈련을 하고 안 하고를 놓고 자칫 본의 아니게 영적 엘리트주의나 분파주의에 빠지기도 쉽고, 무엇보다도 최근 이삼십 년 간 한국교회의 지배적 트렌드는 부르짖고 외치는 영성(crying & shouting spirituality)이기에 이런 조용하고 느린데다가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슬로우 영성(slow & silent spirituality)을 영 어색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아졌다는 점에서 이 또한 호불호(好不好)가 크게 갈리면서 보편적인 영성 훈련으로 자리 잡는 데는 쉽지 않아 보인다.
3. 은사적 영성
영빨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영성 이해 가운데 은사, 특히 가시적인 은사를 영성과 동일시하는 움직임이 있다. 은사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가시적인 은사를 받지 않으면 뭔가는 빠진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게 되고, 그런 은사를 받아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런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영성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영성이 박약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 놓았다. 아니, 이들은 어쩌면 영성이라는 추상적이고 거북한 개념보다는 은사라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실체를 더 중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성을 은사와 동일시하거나 은사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정작 추구해야 하는 영성 훈련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은사를 추가하는 데 더 열심을 내게 마련이다. 영성이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연단(lifelong discipline)을 거쳐서 서서히 축적되는 것임에 비해, 은사는 단방에, 단기간에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지루하고 힘이 드는 영성 훈련보다는 다이나믹하고 스릴이 넘치는 은사 훈련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그러나 은사와 영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며, 무모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되면 본말이 전도되면서 자칫 왜곡된, 자기류의 영성에 빠지기 쉽다. 구속(救贖)은 단번에 가능했지만 구원은 두고두고 살아내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영성 또한 단번에 습득되는 게 아닌 것이다.
4. 지도력, 리더십 영성
영성의 실체와는 별도로 영성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영성을 지도력 또는 리더십과 같은 선상에 두려는 흐름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동안 한국 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리더로 선출되거나 행세하던 이들 가운데 의외로 영적으로 함량 미달이 적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기왕이면 영성을 겸비한 리더십을 기대하면서 이런 이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영성을 단순히 기질적인 이해를 넘어 자질로서의 영성, 그 중에서도 주로 기능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많은 영역이 그러하듯이, 리더십도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어느새 성공주의가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탁월한 리더십은 영적 성품이나 훈련 없이도 기능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탁월성, 효율성, 주도성 등 경영 능력과 관련된 개념으로 영성을 보기 시작하면 영성의 외연은 넓힐 수 있을지 몰라도 불가불 영성의 본질은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영성을 지도력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리더십이 곧 영성은 아니라는 점과, 영성을 가진 사람이 다 리더의 자질을 갖진 않았다는 점에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5. 생활 영성,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영성에 대한 이해가 아직까지 모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요 근래 가장 인기 있는 영성 이해는 일상생활 영성(everyday spirituality)이 아닐까 싶다.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전통적인 주일 영성(sunday spirituality)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일 교회 안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부쩍 회자되고 있다.
일상생활의 영성은 곧 삶의 현장에서 제자의 삶을 사는 제자도로 연결되고, 제자도는 영적 성품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삼자가 잘 어울리는 환상의 조합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폴 스티븐스(Paul Stevens), 마르바 던(Marva Dawn) 등의 책이 여러 권씩 번역된 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책은 그 동안 특수하게 한쪽으로만 치우치거나 큰 변화 없이 오래 고여 있던 영성 이해의 새로운 물꼬를 트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대중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이해가 가능하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물론 영성과 제자도, 영성과 영적 성품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쉽게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폭넓은 개념들이다. 백보 양보해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영성을 제자도와 바로 치환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영적 성품이 영성이라면 이 성품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애매하고 모호하기만 했던 영성, 손에 잡히지 않고 땅에 두 발을 붙이지 않은 채 신자의 실생활과는 괴리된 채 붕붕 떠다니는 것으로 인식했던 영성, 소수의 전문가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영성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씨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보고 배우는 영성
한국 교회에서 이렇듯 영성이 손에 잡히지 않고 미로를 헤매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 데는, 다른 신앙 요소들과는 달리 영성이 학습이나 훈련으로 획득하는 게 아니라 지도자나 스승에게서 보고 배우면서 자연스레 전수되는 특성에 기인한 바 크다. 성경 읽기나 공부, 기도 생활, 성도 간의 교제와 봉사, 복음 전도와 선교 등 그리스도인의 기초삶(Christian Basic Life)은 리더의 지도에 따라 일정 코스나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몸에 배게 된다.
그러나 영성은 어떤 과정을 가르치거나 훈련해 실습한다고 바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내면의 변화랄까 속사람의 성숙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혼동해서 무슨 무슨 세미나니, 과정이니 하는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이수하면 갖춰진 양 자위하지만, 솔직히 한국 교회만큼 제자훈련이나 사역훈련을 비롯해 각종 훈련이 강조되는 풍토도 흔치 않지만 그만큼 실제적인 열매를 맺으면서 자신과 공동체의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느냐 하면 솔직히 다들 자신이 없어진다.
리더십과 마찬가지로 영성 또한 기본적으로는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주로 보고 배우는 통로는 목회자나 중직자들의 말과 행동이 되기 쉽다. 자신이나 동료 신자들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나 찬송, 기도하는 스타일도 지도자들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바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듯 보고 배우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만, 문제는 좋은 것이나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이나 부정적인 것들도 알게 모르게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지도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처음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서 염려하고 지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한마디로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은 신앙생활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게다가 보고 배우는 일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바라보고 지켜보는 지도자들의 삶이나 성품이 전반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큼 탁월하거나 균형 잡혀 있지 않고, 지도자들 자신도 삶을 통한 영향력 전수를 어색해 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고 배우는 일은 단번에 원샷(one shot)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교정과 반복을 통해 조금씩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란 점에 대해서도 상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책임이 큰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보여줄 게 별로 없다
목회자들의 삶이 일반 성도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일상과 일과(日課)는 큰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말씀 보고,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는 게 일상사인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잘 모르기에 감이 떨어지고 거리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TV 드라마에 열광하는 주부 신자, 주식과 펀드 투자 손실로 전전긍긍하는 직장인 신자, 아이돌 가수들의 신곡과 춤에 열광하는 청소년 신자들의 삶에 비해 목회자의 일상은 너무 거룩해 보여 큰 갭(gap)을 만들어 낸다.
어쩌다가 설교에서 드는 문화 관련 예화들은 대부분 유치한데다 국적 불명에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며, 그나마 성도의 일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래되고 낡은 레코드처럼 들리기 쉽다. 성도는 설교를 통해 목회자의 삶을 대하는 자세나 라이프스타일을 따라 배우고 싶건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구별됐든 구분됐든 아쉽게도 그들에게 보여줄 게 별로 없는 괴리된 삶을 살고 있다. 현실에 두 발을 붙이고 있는 영성이 아닌 것이다.
2. 제대로 보여주는 걸 꺼려한다
요즘은 셀교회나 가정교회가 많이 도입되어 이전보다 셀이나 목장 같은 소그룹이나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성도들 간의 삶의 나눔은 마치 철칙이라도 되는 양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면서도 정작 리더인 자신의 삶은 꽁꽁 감춘 채 나누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
설교할 때나 회의할 때 딱딱한 분위기를 녹일 겸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하듯 자신의 삶을 한두 자락 들춰내 보여주면, 그걸 보고 배운 성도들 간에 나눔이 활성화 되면서 서로 보고 배울 수 있건만 의외로 이것을 어려워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누가 맨날 자신의 삶을 나누라고만 할 때 좋아하겠는가. 다른 사람, 특히 본받고 싶은 리더나 지도자의 삶을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따라 해 보고 싶은 게 성도들의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걸 할 줄 모르고, 자신의 삶은 꽁꽁 감춰놓는 데 급급한 게 대다수 목회자들의 삶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가정생활도 보호받기 시작한 건 좋지만, 이게 지나쳐 거실과 식탁, 서재에 교인들이 초대되어 다과를 나누면서 한담을 나누며 우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이다. 이래서는 소통(communication)이 안 되고 스파크(spark)도 일어날 수 없고, 삶으로 보여주는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3. 보여줄 줄도, 볼 줄도 모른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삶을 설교나 대화를 통해 오픈했다간 성도들이 기어오르거나 우습게 여길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이상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두꺼운 커튼이나 베일로 감추는 경우가 있는데, 착각도 이 정도면 꽤 중증이지 싶다. 글쎄, 현대의 영민한 교인들이 목회자가 자신의 개인사나 가정사를 나누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고 있을까. 어쩌면 이런저런 사발통문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안 그런 양 모른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눔과 소통이 없는 곳에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삶을 잘 보여줄 줄 모르면 백보 양보해서 교인들의 삶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삶의 애환을 주의 깊게 경청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보여줄 줄 모르는 리더들은 의외로 잘 들을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목회 상담은 목회자의 중요한 소양이지만, 제대로 질문하는 법도 모르고, 제대로 들어주는 일도 등한히 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다. 정기적으로 만나 잘 들어주고 반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상담을 하고, 코칭을 하고, 멘토링을 하고, 제자훈련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듣긴 들어도 건성으로 듣기 때문에 실제적인 조언이나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뻔한, 누구나 아는 얘기를 반복하게 돼 신선감을 상실하고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4.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획일화를 추구한다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왕왕 참된 연합보다는 군대식의 획일화된 이상한 영성이 판을 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연합과 일치는 연례적으로 표방하는 표어나 슬로건에나 장식될 뿐,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하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나아가 그렇게 하긴 하더라도 하나 됨을 유지하고 힘쓰는 것을 똑같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마치 <몬스터 주식회사>에 나오는 몬스터들이 각기 특색 있게 웃긴 모양과 캐릭터라서 눈길을 끌고 재미있는 것이지, 화면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온통 외눈박이 마이크 와조스키라면 기괴하기만 할 뿐 아무도 재미있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하나됨을 추구한다면서 엉뚱하게 획일화(uniformity)를 추구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카리스마는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잘못 사용되거나 번지수를 제대로 못 짚으면 우스운 형국을 연출하게 된다. 서로의 부르심과 은사를 존중하면서 강한 지체나 연약한 지체나 서로 돌보며 함께 자라가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이상한 영성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5. 나눔(life sharing)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영성이건 신앙생활이건 나 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하고(interdependent), 더불어 함께 자라간다(growing together)는 의식이 박약할뿐더러 별로 강조되거나 훈련되지 않는 점도 나눔이 부진한 이유가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개인의 신앙, 개인의 경건, 개인의 헌신은 강조했지만 공동체성에 대해서는 모여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딱히 강조하지 않아 왔다. 그러다보니 서로 삶을 나눈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고 영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엮이는 걸 귀찮아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행히 요 근래 셀교회 운동과 가정교회 운동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하고 조금씩 보급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엄숙주의에 빠져 있고, 경직돼 있는 게 사실이다.
나눔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을 때 그것을 깨는 방법은 누군가가 용기를 내서 총대를 메고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목회자나 중직자들부터 과감히 자신의 삶을 오픈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긴장이 풀어지고 나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눈 녹듯 사라지면서 진정한 나눔이 시작되고, 서로 보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6. 정말 배우고 흠모하며 따를 만한 본보기가 없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삶을 잘 못 나누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사실 평신도들이 닮고 싶은 목회자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눔의 철학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목회 리더십에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교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포장하는 메시지나 목회 스킬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목회자의 성품과 커뮤니케이션 방식 등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좀처럼 구경하기 어렵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목회자들의 영성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엉성하고, 성도들이 바라보고 배워야 할 지도자들의 영성은 영 성의가 없어 보인다. 자신에게는 남들이 흠모하고 따를 만한 인격이나 성품적 매력이 없으면서 강단에서 성도들의 삶이 변해야 한다고 백날 외쳐봤자 너나 잘하시지 하는 비아냥을 받으면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지몽매한데다 얌체에 끼리끼리까지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영성이 애매모호할 뿐 아니라, 왜곡되고 별로 내세울 게 없어진 주요한 원인 제공자로 목회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면서 그들 탓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에게 곧바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지도자들이 어떠하든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영성을 훈련하고 개발해서 삶 가운데 드러내 주위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풍겨야 할 당사자는 바로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지도자들과 교회 환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자신들의 부족한 영성을 그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너무 공평하지 않고, 무책임해질뿐더러 실제로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요즘 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잘 살게 된다는 가짜 메시지의 변형에 다름 아닌 “부자 되세요!”로 대변되는 사이비, 혼합주의 영성에 깊이 물들어 있다. 이와 함께 그들을 지배하고 둘러싸고 있는 잘못된 영성의 단면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무지몽매한 영성
2000년대 초반 일부 대형교회의 교회세습 반대운동 현장에서 세습하는 교회의 평신도 중직자들은 합리적인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로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 편을 들었는데, 대학 교수나 변호사 같은 직업에서 예상되는 합리적 고민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들에게 담임목사는 아무도 그 권위를 범접하거나 해칠 수 없는 신처럼 보였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기울어진다 하더라도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어서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탄을 받는 사안에 대해서까지 충성, 교회 안의 일 운운하며 이런 무지몽매한 영성을 갖게 된 것을 과연 지도자들 탓만 해야 하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도 힘이 들고 부담 되는 메시지나 훈련이 시작될라치면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스스로 성장을 멈추는 우를 범해 오지 않았던가. 매일 말씀을 펴서 은혜를 자급자족할 줄 모르고 주일설교에만 의존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모르고, 사사건건 지도자들이 지시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대로만 따라갈 수밖에 없는 허약하고 무지몽매한 대중추수주의적(포퓰리즘) 영성을 가진 신자들이 많다.
2. 얌체 영성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교회 밖의 평가를 한두 단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라면 그 중하나는 얌체 심보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기독교인들의 병폐로 지적돼 온 개인주의를 넘어 챙길 건 다 챙기면서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은 회피하려 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 별다른 매력을 풍기지 못함은 물론 때로는 민폐를 끼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죽하면 교회 다닌다는 그 친구 때문에라도 교회엔 가고 싶지 않다는 불신자들의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면서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고 나누어 주는 기독교 영성의 ABC도 모르는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 전체 이미지도 알게 모르게 악영향을 받고 있다.
3. 끼리끼리 영성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교제해 온 친한 사람, 그 중에서도 서로 사는 형편과 처지, 직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그룹을 이루면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여간해선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형제여, 자매여 하지만, 속까지 보여주고 내주면서 서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여간해서 보기 어려워졌다.
“서로 사랑하라”를 위시해 신약성경 도처에 나오는 상호 명령(mutuality command)을 이들은 모르거나 간과하거나 건성으로 지키거나 심지어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성골 또는 진골에 속한 자기들끼리는 끔직이 좋겠지만, 그 교제권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 안으로 진입하는 데 너무나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고 있다. 전도되어 새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불신자는 물론이고, 오랫동안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교제해 온 동료 신자들도 여간해서 이 장벽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끼리끼리 의식 또는 영성을 당사자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끼리는 장기간 비슷한 조건 아래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영성을 갖고 있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끼리끼리 영성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짬짜미로 발전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건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 됨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
4. 균형 잡히지 않은 영성
아마도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영성과 관련된 크고 작은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영성일 것이다. 개념 정리가 잘 안 되어서 그렇지 사실 한국교회만큼 영적인 생활 또는 영성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교회도 흔치 않은데, 문제는 이러한 열심과 영성이 중구난방으로 체계적이지도 않고 질서도 없이 각자 입맛에 맞는 대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면 자신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만이 전부인 양 고수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꺼려하고, 자칫 그때그때 유행하는 흐름과 분위기에 쏠리기 쉽다. 뭐든지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한 법이다. 균형을 상실한 기독교 영성은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따라 하거나 본받고 싶지도 않아진다.
세상이 교회를 보는 이미지, 영성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차원과 함께 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맺게 되는 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신자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단순히 전도 대상으로서만이 아닌, 일상을 함께 호흡하며 나누는, 어쩌면 신앙생활의 열매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 즉 세상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가 지니고 있는 영성은 교회 안에서만, 신자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불가불 불신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동료 신자들과는 달리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믿음의 내용이나 대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그가 삶으로 드러내는 열매를 통해서만 그의 신앙을 저울질하게 마련이다. 즉 그가 아무리 입으로는 온갖 거룩한 말을 쏟아내고,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더라도 그의 실생활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실속이 없으면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믿는 기독교, 그가 다니는 교회가 더불어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신자의 영성의 깊이와 진정성을 가름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최근 십여 년 간 한국 기독교와 교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 준 이미지는 감동과 영광을 전달하고 확장시키기보다는 실망과 우려를 넘어 심지어 욕까지 듣게 되는 아픈 상황에 이르렀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물론 기독교와 교회의 밝은 면, 좋은 면들이 액면 그대로 전달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런 걸 왜 못 봐 주었냐고 탓할 것도 없고 탓해 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밖에 안 될 것이다. 그네들에게 비친 우리의 자연스런 모습, 평소 실력이 그런 것이지, 남 탓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영향력이 큰 지도자들의 모습과 대형교회들이 보인 행태들에 대한 실망과 반감에 기인하는 바 크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으로 대표되는 천주교와 불교의 이미지에 비해 누가 개신교를 대표하는지 모를 정도로 인물난을 겪고 있는 게 솔직한 현실이며, 그나마 자천타천 기독교를 대변할 만한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보여준 실망스런 행태는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와 교회에 손짓을 하는 차원을 넘어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부 젊은층에서 안티 기독교 운동이 촉발되도록 원인 제공을 하였다.
사회적 상식에도 어긋나는 막무가내 식 혈연관계에 올인한 교회 세습, 교회 재산을 둘러싼 이전투구와 빼돌리기, 실속 없는 세 과시에 불과한 대형 연합행사의 남발 등으로 당분간 쉽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지가 악화된 것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선도적 종교가 아닌, 오래 전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존경과 신뢰를 상실한 넘버 2, 넘버 3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건 옥에 티에 불과할 뿐 우리 안에 귀하고 소중한 게 많이 있는데 그걸 몰라준다는 우리의 푸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과 불신자들은 이런 것을 기독교 영성으로 이해하면서 어느새 기독교에 흥미를 잃고,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영성 훈련과 영성 추구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 드러나는, 특히 불신자들과 조우하고 부딪히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일상의 삶과는 유리되고 고립된 교회 안의 온실 속 영성, 사적이고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영성만으로는 곤란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타개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새롭게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는 것 이전에 이런 현상을 불러온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심각한 우리 자신의 탐욕과 권력과 성공에 대한 추구부터 반성하고 참회하는 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GPS 영성에서 HIS 영성으로
- 로잔 2010 대회의 교훈
2010년 10월 케이프타운에서 21년만에 열린 로잔 3차 대회의 여러 강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였다. 로잔 신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번 대회의 대표적인 결과물인 "케이프타운 헌신"(The Cape Town Commitment)을 작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폐회 전 날 “Calling the Church Back to Humility, Integrity and Simplicity”란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잘못된 GPS를 갖고 있는데, 이것을 경계하고 탈피해야 할 뿐 아니라, HIS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잘못된 GPS는 Greed(부와 탐욕), Power(권력과 자만), Success(인기 영합과 성공)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으로 현대 교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가 상정한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겠지만, 한국 교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미 한국 교회의 영성도 이렇게 잘못된 GPS를 갖고 있으며,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실상은 목회와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중요하고 소중한 신앙의 유산과 정신들은 잠시 유보하거나 버려도 무방하다고 은연중에 가르치고 학습하고 열중하며 즐기고 있는 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영성은 거추장스러워졌고, 제자도는 피곤해졌으며, 복음은 아예 잊어버리거나 내다버리기에 이르렀다. 예배도 교육도 교제도 전도도 선교도 이런 관점에서 행해지고, 마치 그것이 진리인 양 선포되는 양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깊숙하게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는 GPS 영성은 전형적인 사이비 영성(Pseudo-spirituality)이다.
크리스 라이트는 우리가 잘못된 GPS를 버리고 돌아가야 하고 회복해야 할 것으로 HIS 영성을 주창했는데, HIS는 Humility(겸손), Integrity(온전함), Simplicity(단순성)의 머리글자 모음이다. 케이프타운 헌신의 완성본이 어떤 내용을 담을지 몰라도 이 세 가지만으로도 이번 대회를 압축해 보여주는 로잔 정신으로 손색없어 보였다.
힘(Power)을 추구하는 영성을 버리고 회복해야 하는 겸손은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성공(Success)의 우상에서 회복해야 하는 온전함은 매일 영성(everyday spirituality)에 다름 아니고, 탐욕(Greed)의 우상에서 회복해야 하는 단순성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삶의 방식(simple lifestyle)으로 해석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영성은 이렇게 단순하게 말로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고, 그저 신앙 연조가 쌓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서 자동적으로 업그레이드 되거나 좀처럼 일상화 되지 않는 딜레마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흔한 것 같으면서도 막상 이런 영성을 제대로 갖춘 이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소박하지만 통렬한 도전이고,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갖추고자 하는 이라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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