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십자가
Posted 2011. 6. 17.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산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나무들이다. 높은 하늘과 계곡이 수준급
조연 역할을 하지만, 수로나 다채로움에서나 상대가 안 된다. 철마다 색을
바꿔가며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줄기와 잎은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경관을
빛내주거니와, 땅바닥으로 뻗은 뿌리마저 오르막에선 자연 계단 노릇을
충실히 그리고 묵묵히 감당한다.
산길을 걷다 보면 워낙 볼 게 많기 때문에 발밑에 닿는 뿌리까지는
눈길이 잘 안 가지만, 어쩌다 내려다 보면 하나도 똑같은 모양이 아니고,
각양각색으로 자리잡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큰 나무들은 뿌리도 굵은데,
예서 여기저기 맘대로 퍼져나간 잔뿌리까지도 볼 만 하다. 어떤 건
산삼 형상으로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다윗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다윗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의 히브리어 하카톤(haqqaton)으로 불렸다는 대목이
생각난다. 다윗이란 이름이 있었지만 그저 별볼일 없고 제일 작고 약한
막내로 불렸다는 건데, 뿌리를 보면서 쌩뚱맞게도 그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오후, 뿌리가 만든 십자가를
봤다. 정교하거나 예술적이지 않고, 투박하고 가로 세로 비율도 잘 맞지
않았지만, 열 십 자 십자가 형상이었다.
뿌리 십자가 왼쪽으로는 중간 크기의 마른 나뭇잎이 떨어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아주 작은 풀잎이 바람에 날려와 피어나고 있었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죽음과 부활을 잠시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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