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깟 기다림 쯤이야
Posted 2014. 10. 23. 00:00, Filed under: I'm traveling/Wild Yosemite지난 여름 요세미티 백패킹 출발 지점인 투올러미(Tuolumne) 사무소에 들려 서류 확인을 하고 곰통을 빌리는 등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세월 편한 복장과 포즈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허름한 차림에 이 산중에 웬 노숙자들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뭔가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앉아 있는 옆에 세워 놓은 팻말엔 "11시 줄 - 예서 기다리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CP의 설명인즉, 백패킹 사전 허가(Permit)를 받은 이들 가운데 안 오는 이들이 생기면 그 자리를 선착순으로 차지하는 대기 행렬이란다. 요세미티 밸리에서 당일에 하프돔을 갔다 온다든지 하는 데이 하이킹(Day Hiking)이 아니라, 우리처럼 사나흘 텐트 치고 잠을 자면서 하는 백패킹은 몇 달 전에 인터넷 신청을 받아 인원수를 제한해 허가증을 발급하는데, 그걸 놓친 이들 가운데 허가 받은 누군가 안 와서 TO가 생기길 기다리는 풍경이었다.
누군가 안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의 빈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고, 설사 예약 인원이 빠짐없이 다 와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변 요세미티 풍광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경험 자체도 해볼만한 것일지 모르겠다.
투올러미에서 출발해 하프돔에 오르고 요세미티 밸리에 내려와 하루 쉬는 4박4일 백패킹을 마치고 밸리에 있는 비지터 센터를 둘러보는 중에도 이런 대기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투올러미에서 봤던 줄보다 조금 길었는데, 장시간 대기를 위해 캠핑 의자에 앉은 이들도 있고, 배낭을 등받이삼아 그냥 바닥에 다리를 뻗고 동행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보였다.
고도가 높은 투올러미는 선선한 느낌이었는데, 산 아래쪽인 여긴 아침부터 더운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해 주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예약 신청한 이들이 다 와서 허탕을 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를 바래줘야 하는 건지, 이미 백패킹을 마친 우리는 이들을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므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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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기 때의 휴양림도 숙소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어느 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덕택에 무작정 들어갔다가 숙소를 잡았던 적이 있어요. 정말 기분이 좋기는 하더라구요. 딱 두 곳이 예약 불발이 되더군요.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잽싸게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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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감래라고, 비가 억수로 뿌려대면 종종 그런 행운이 따라오기도 하는군요.^^
저희가 백패킹 출발하던 날도 비가 내리긴 했는데, 저분들이 날씨 덕을 봤을지 모르겠네요.
Permit을 제한된 인원에게만 발급하기 때문에 애써 받은 걸 포기할 이들은 별로 없을 것 같아
기다려도 허탕칠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기다리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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