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늉과 경계
Posted 2017. 8. 24.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등산로 초입의 텃밭들이 한여름 고온다습에 종종 내리는 비까지 흠뻑 맞으면서 무성해졌다. 고추가
자라면서 타고 가도록 박아놨던 말짱 높이 만큼 고추밭도 부쩍 키가 컸고, 넓은 잎 호박밭은 호박이 어디
달려 있는지 모를 정도로 수북하게 덮고 있다. 그리 넓진 않아도 이른 봄부터 텃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말짱을 꽂는 등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니, 내 밭은 아니어도 산에 오르내릴
때마다 힐끗 보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곳이다.
작물들이 달리고 수확철이 되면서 지나다니는 이들의 손을 탈까봐 노심초사 주인은 어설픈 경계를
설정했다. 저 허술한 줄 하나가 혹여 맘먹고 따러 오는 이들에겐 아무런 저항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마치 지난 봄부터 결승점까지 땀 흘리며 힘껏 달려오지 않았다면 이제와서
골인 테이프를 끊을 엄두일랑 내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경계인듯 경계 아닌 경계 시늉이 그 어떤
강력한 경고문보다도 웅변적으로 들렸다.
맘 먹고 허리를 좀 숙이거나 아예 옆으로 들어가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어 보이고, 반대 방향으로
얼마든지 들어가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저 경계 테이프 한 줄로 주인의 간절한 마음이 읽혀졌다. 저 테이프가
쳐 지기 전에는 가끔 들어가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곤 했지만, 기꺼이 저 선을 넘어 주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 자란 작물 구경은 그 옆에 있는 오픈된 다른 텃밭에서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저 너머는 오롯이 땀흘린 주인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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