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벤치
Posted 2011. 6. 4.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비가 온 다음날의 벤치는 젖어 있다. 서 있는 나무들이야 비를 맞아도 그냥 흘러내려 만져보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누워 있는 벤치는 물기를 완벽하게 떨어뜨릴 수
없어 비 맞은티를 낸다.
산에 가 본 이들은 안다. 벤치가 놓여 있는 공간이 얼마나 요긴하고 소중한지를. 벤치는 아무
데나 놓이는 법이 없다. 어느 정도 오르막이 끝나고, 약간의 시야가 확보되는 지점이라야 벤치가
놓일 수 있다. 한 마디로 명당 자리가 아니면 놓일 수 없다.
그래서 산에 오는 사람들은 벤치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낀다. 지치고 힘들면 등산로에서 벗어나
숲길이나 바위, 나무 밑 어디나 앉을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편한 벤치에 앉으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
하고,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선점하지 않고 한두 귀퉁이가 비워 있을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를 흠뻑 맞은 벤치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으면 금세 마르지만, 그늘에 있으면 쉽게 마르지
않는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야 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줘야 젖은 몸이 마르는 쇼 타임이 시작된다.
젖은 몸이 완전히 말라 다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사랑받게 되기까지 외롭고 심심할까봐
나뭇가지와 작은 잎 하나가 자리를 청하며 넌즈시 말을 건다. "어이, 친구! 지난밤 비바람 굉장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