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갑오 황태구이
Posted 2011. 8. 17.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百味百想
토일월 교회수련회를 마치고 전주 한옥마을을 1박2일로 다녀왔다. 4시 반쯤 도착해 전주비빔밥으로 늦은 점심 겸 저녁식사를 하고, 골목을 구경하면서 숙소를 정했다. 전주는 30도가 넘는 무더위라 조금만 걸어도 축축 늘어져 샤워를 하고 쉬다가 9시 넘어 블로그에서 본 가맥집 전일갑오를 찾았다.
원래는 전일슈퍼였는데, 갑오징어의 갑오로 이름을 바꾼 것 같았다. 한옥마을이 끝나는 농협 건너 골목에 있었다. 슈퍼 앞에 H사 박스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걸로 봐서 예사 슈퍼 같지 않아 보였다.
가맥은 가게 맥주집 또는 길거리 맥주집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전일슈퍼란 동네슈퍼에서 퇴근길의 동네 사람들이 병맥주를 시킬 때 간단한 안주로 내놨는데, 이게 히트를 쳐서 지금은 슈퍼보다 가맥집으로 유명세를 타기에 이르렀다. 가는 길을 몰라 택시를 탔는데, 가 보니 한옥마을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우리같이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하도 이 집을 찾아 기사분들은 누구나 아는 집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 골목에 자리잡은 슈퍼였는데, 가게 앞에도 앉을 수 있지만, 작은 슈퍼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큰 규모의 왁자지껄 거나한 선술집 분위기가 펼쳐진다. 저 홀 안에 또 탁자 서너 개가 놓인 작은 방이 있는데, 우리가 들어섰을 때 마침 거기에 한 자리가 나서 잽싸게 일단 앉았다.
테이블에 앉으면 일단 아주머니가 세 병을 들고 오는데, 이 집은 이게 기본 같았다. 우린 주당이 아니고 전주의 나이트 라이프를 구경하면서 기분 내러 온 관광객이라^^ 한 병만 시켰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분위기가 꼭 어차피 추가로 시킬 거면서 이상한 손님들이군, 하는 것 같았다.
이 집의 대표메뉴는 8천원짜리 황태구이다. 계란말이, 갑오징어 구이도 많이들 시키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이 서넛만 됐어도 골고루 시켰을 것이다. 거짓말 안 보태고 1분도 안 지나 스덴 쟁반에 노릇한 황태구이와 양념장이 나왔다. 끝내주는 스피드다. 모름지기 장사는 이렇게 하는 거다.
꾼이나 주당이 아니어서 황태 하면 북어 비스무리하게 딱딱하고 질긴 놈인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부드럽고 상당히 실한 놈이었다. 두툼한 살이 짜악 짝 잘 찢어졌고,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연신 간장쏘스에 찍어 입에 넣기 바빴다.
이 집의 황태를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 중 하나는 간장쏘스인데, 잘게 썬 청양고추와 참깨가 전부로, 뭐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지만, 이게 맛이 묘한 게 황태와 환상적인 궁합을 과시했다. 아마 간장에 특별한 맛을 내도록 손을 쓴 것 같았다.
마요네즈를 넣은 장도 있다길래 가서 달랬더니, 이것도 입에 착착 붙는다. 이러니 기본 세 병이고, 탁자 위엔 빈병들이 계속 쌓여가는 것 같았다. 재밌는 건, 이 집이 슈퍼이므로 앉아서 시킬 수도 있지만 가서 사다가 갖고 오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마요네즈 간장쏘스를 얻으러 간 김에 수북히 쌓인 황태구이 작업장을 놓칠 수 없다. 십여 마리 넘게 구어져 있어 주문에 바로바로 대령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황태도 좋은 걸 쓰겠지만, 연탄난로에 굽는 솜씨도 남다르기에 이렇게 입소문, 블소문이 나서 나같은 사람도 불러 모으는 게 아닐까.
다 먹고 일어서려니까 두상만 남은 황태머리와 짜악 짝 찢을 때 바스라져 부스러기가 된 것들이 마치 양명문 사, 변훈 곡의 가곡 <명태>의 한 구절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작은 감동이었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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