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파트너십
Posted 2012. 2. 20.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올해 들어 처음 집앞 검단산을 다녀왔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나가사끼 면 하나 끓여
먹은 다음 프로농구 빅게임이랄 수 있는 2, 3위를 달리는 KGC와 KT전 중계를 뒤로하고 2시 반쯤
혼자 집을 나섰다. 오후의 겨울산은 생각했던 것보다 춥지 않았는데, 그래선지는 몰라도 휴일
오후의 검단산은 등산객으로 넘쳐났다.
곱돌약수터까지 내쳐 오른 다음 1분간 휴식하고, 헐떡고개 앞에 이르렀다. 10분에서 15분을
헐떡거리며 올라야 정상에 진입할 수 있는 이 산의 난코스 중 하나다. 이럴 땐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게 장땡인데, 내 바로 앞에서 오르고 있는 이들 가운데 스피드가 나와 비슷한 이를 찾아 가까이 붙은
다음 그이의 발뒷굼치를 쳐다보며 걸어 올라가면 비교적 수월하게 이 코스를 오를 수 있다.
아직 도사가 되려면 멀긴 하지만, 그래도 등산에 재미를 붙인 지 5년쯤 되니 오늘 등산의
파트너로 삼을 만한 이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마침 나와 비슷한 연배의 점잖은 양반이
보였다. 젊은 친구 하나가 그 앞에서 올라가고 있는데, 어째 조금 힘들어 하는 기색이 보인다.
표정과 숨소리 그리고 걸음 내딛는 소리로 알 수 있다.^^
내가 오늘 파트너로 점찍은 이는 예상대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발을 내딛으면서
젊은 친구 뒤를 따라가더니 천천히 추월하기 시작했다. 산에서는 추월도 다 때가 있고, 매너가
있는 법인데 이 양반도 그걸 아는 것 같았다. 조금 기다려주는 듯 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공간에서 앞서 가더니 조금씩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간혹 아주 빠른 속도로 산을 타는 이들이 있다. 조금 과장해서 평지를 걷는 것보다 빠르게
산을 타는 이들이 있다. 타고난 체력에 오랜 산행 캐리어가 묻어나는 이들은 부럽긴 하지만
내 파트너가 될 순 없다. 쓸데 없는 오버 페이스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격이 돼 금세 숨이
차오르고 지쳐 떨어지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이 양반의 발뒷굼치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더니 어느새 헐떡고개가
끝나가면서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능선이 펼쳐진다. 덕분에 오랜만의 등산을 어렵지 않게
마칠 수 있었다. 그이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뒤를 따라 걷는 내게 좋은
가이드가 됐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나도 뒤에 오는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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