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뿌리 드러낸 나무
Posted 2012. 5. 22.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Joy of Discovery
흔히들 큰 나무를 뿌리 깊은 나무라 부르지만, 사실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잘 가늠하기 어렵다. 땅 속 깊이 박혀 숨어 있는 뿌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략 그러겠거니 하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지, 실제 그 길이나 깊이 그리고 갯수나 모양을 파악하는 건 원천척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드리 나무는 그 키며, 두께며, 가지와 울창한 잎에 이르기까지 볼 게 많아 안 보이는 뿌리까지 관심을 두진 않는다.
그러다가 나무를 베어 촘촘한 나이테라도 드러나면 뿌리도 대단하겠거니 짐작하게 되고, 아주 가끔 태풍이나 홍수로 뿌리째 뽑혀 누워 있는 나무를 보면 그제서야 뿌리의 세계를 대충 볼 수 있지만, 그것도 대개는 잘려 있거나 흙과 단단히 얽혀 있어 제대로 보긴 어려운 법이다.
천 미터가 넘는 큰 산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륙백 미터급의 동네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뿌리가 땅속으로만 박혀 있지 않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땅 위로도 제법 여러 갈래로 퍼져 있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개중에는 아예 나무가 서 있는 일대, 그러니까 반경 수 미터를 온통 제 땅인 양 영역 표시를 하면서 실력 과시를 하는 친구들을 솔찬히 보게 된다.
지난주 팔당의 예빈산에서도 그랬다. 어떤 뿌리들은 도저히 한 나무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흙 위로 사방 팔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자기들끼리 얽히고설켜 계단을 이루고 있었다. 땅 위에 드러난 뿌리가 이 정도니, 땅속 깊이 넓게 박힌 원뿌리는 어떤 모양일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도, 그림이 그려지지도 않았다. 뿌리가 만든 계단을 밟으면서 새삼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과 경이를 연발해야 했다.
땅속에 은근히 자리 잡아야 할 뿌리가 왜 돌출했는지, 등산객들에 밟히고 찍히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굵고 길어 오르내리막 길의 발판이나 계단 역할을 충실히 하는 뿌리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등산객들과 쉽게 어울리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까 산에서는 꼭 뿌리 깊은 나무가 아니더라도 뿌리 넓은 나무, 뿌리 많은 나무, 뿌리 기~인 나무도 똑같이 환영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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