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봉에서 벌봉 가는 길
Posted 2011. 11. 3.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때때로 이름 때문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지만, 산 이름이
그럴 때가 있다. 몇 해 전부터 dong님에게서 쥐봉과 벌봉 길이 좋다는 말을 듣고선 어감이 좋아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한두 번 시도하다 말았다. 길치인 탓에 잘 찾지 못했기 때문인데, 지난 주일
아침, 드디어 그 길을 찾았다.
우리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의 43번 국도, 그러니까 하남에서 광주 가는 길 초입에 마방집이란
제법 알려진 음식점이 있는데, 그 집 건너편에 커피 볶는 집 벨가또를 끼고 들어가면 바로 굴다리가
나오는데 굴다리를 지나면 또 바로 위례 둘레길 안내판이 나오면서 나무 계단이 시작된다. 그리로
올라가면 중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고, 그 다음부터는 길 표시가 잘 돼 있다.
길 이름이 새겨진 안내판과 리본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에 묶어 놓았는데, 제주 올레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여기도 주황색과 파랑색 리본이다. 리본엔 하남 위례길이라 새겨 있는데, 둘레길
열풍에 이름을 바꾼 것 같았다. 약간의 오르막이 더러 있기는 해도 둘레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길은 대체로 평탄하고 완만해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만만히 볼 게 안 되는 게, 편도 7km니까 왕복 14km의 만만찮은 거리다. 토요일도 아니고
주일 아침부터 너무 힘을 빼면 안 좋을 것 같아 일단 가는 데까지 갔다가 시간 봐서 중간에 돌아올
요량으로 즐기기로 했다.
쥐봉은 128m의 나즈막한 봉우리인데, 10여 분도 안 되어 나오는데다 잡풀더미 속에 있어
어떻게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능선을 지나다 보면 검단산이 길게 펼쳐져 보이며, 조금 더 가면
객산(301m)도 나온다.
그리 높지 않은 산불 감시 초소가 가을 아침 맑은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제 기능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이렇게 인공 구조물이 서 있는 것도 사진에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뒤로 보이는 산은 산성이 있는 남한산 자락인데, 오늘 저기까지 갔다와야 할 것이다.
소나무 길이 길게 늘어서 있어 운치를 더했다. 아주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벌봉까지 가는 길엔
오고 가는 이가 하나도 없어 이 멋진 둘레길을 온통 독차지할 수 있었다. 얼리 버드가 누리는 호사였다.
나중에 내려오는 길에서야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무가 빽빽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숲길을 펼치는 게 걷기에도 좋고, 앉아 쉬기에도 좋았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나무와 낙엽이 뒹구는 숲길은 평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전달해 주기에 충분했다.
누구라도 마음에 들고 사랑할 법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풍경도 좋았지만, 벌봉 가는 길 중간중간 서 있는 안내판에서 옛스런 풍취가 느껴지는 마을과
고개 이름들이 재미를 더해 주었다. 출발 지점인 샘재(바깥샘재와 안샘재가 있다)며, 고골, 골말,
사미고개, 막은데미 고개, 가지울, 바람재 등 하나같이 예쁜 이름들이 사연을 안고 불려지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지점에 몇 군데 토루(土壘) 팻말이 보였는데, 밑에서 적들이
바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그재그로 만든 방벽이다. 얼마나 방어에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낙엽이 푹 쌓여 덮여 있는 게 나름 요긴하게 활용됐을 것 같기도 하다.
오르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서 저 앞에 남한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런 작은
문은 암문(暗門)이라 부르는데, 화려하고 큰 성문에 비해 작은 것은 사람 하나가 겨우 출입할
정도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엔 16개의 암문이 남아 있는데, 벌봉 앞에 있는 이 문은 13암문이다.
한자로는 봉봉(蜂峰)인 벌봉(512m)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는데, 사람이 올라갈 수도 있는
커다란 바위였다. 벌처럼 생겼다는 이름에 비해선 산 봉우리치고는 그리 잘 생긴 편도 아니고,
전망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남한산성에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다.
쥐봉이나 벌봉이나 그 자체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그 사이에 놓인 길은 산책에
가까운 등산을 하려는 이들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큼 멋졌다. 산성을 한바퀴 일주하는 데는
전에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으니, 위례 둘레길과 산성 길을 합해 하루 날잡아 걷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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