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절박함
Posted 2012. 3. 23.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Joy of Discovery1km쯤 걷다가 창신동 길로 해서 신설동으로 돌아왔다. 역시 강북은 종로나 청계천 같은
번화가만 아니라 오래된 주택가 골목도 구경거리가 많았다. 여행까진 아니어도 도시
나들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창신동 골목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어느 집 회색 쎄멘 담벼락에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써 놓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 사는 주민이 이웃들과 이 길을 지나다니는 이들
들으라고 써 놓은 것으로 보였다. 어렸을 땐 이런 걸 제법 보다가 요즘은 통 못 봤는데,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우선 Black & Red만 사용해 강렬하고 선명한 느낌을 주는 놀라운 색감. 물론 갖고 있던
페인트가 두 색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뭘 좀 아는 이 같았다. 아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세로로 두껍게 칠한 빨간 선은 갑자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칫 단조롭게 보여
쉽게 묻힐 수도 있었던 이 작품을 살려내고 있었다.
이 작품을 만든 이가 남성일지 여성일지는 쉽게 짐작하기 어렵지만, 연령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적어도 50대 이상은 됐을 것 같은 결정적인 실마리는 습니다를 읍니다로 쓴 것.
받침 하나를 빼먹거나, 띄어쓰기를 자유롭게 하거나, 일부러 소리나는 대로 적은 건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절대 시비 걸 일이 아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절박한 가운데서도 유머가 느껴진다. 양심을 논하는 부분에선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간절한 항의와 절박한 호소를 읽을 수 있고, 동시에 마음이 착할 것
같은 주인은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해 아랫줄에 당구장 표시 약물로 번듯한 해결방안까지
전달하려 애쓴 구석이 보인다.
한가지 더. 이 작품의 결정적인 미덕은 메시지의 부드러움에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맞을
때 대부분 짜증과 화를 동반해 흥분하기 쉽다. 그래서 자칫 막말을 퍼붓게 되는데, 그러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지는 거다. 도무지 설득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풍파를
겪을 만큼 겪었을 이 집 주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심호흡 한 번 크게 하면서 Relax하는
놀라운 자제력(내공)을 선보인다. 골목길 여행에서 발견한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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