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3 - 장형(長兄)의 추억

괴산 동생네서 하루를 보내면서 거실과 안방, 식탁에 걸린 장형(長兄)의 작품들과 해후했다. 계해(1981), 병인(1986), 신미년(1991) 작품들이니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힘있게 써 내려간 것들이다. 시제를 밝히지 않은 한시와 청록파 조지훈 시, 향가 찬기파랑가에, 예서와 궁서, 한글 고체로 서체도 다양했다.

 

작년에 동생네가 중국에서 돌아와 괴산에 거처하게 되면서 형수님이 백형(伯兄, 장형이라고도 하는데 맏형을 말한다)의 작품들 가운데 몇 점 주신 것 같은데, 해독하기 어렵지 않은 싯구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살아 계셨으면 일가를 이루셨을 텐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환갑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더 됐다.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장형은, 상대 재학중에 동양화에 꽂혀 당대의 대가들인 심산(心汕) 노수현 선생을 사사하며 그림을 배우다가 서예로 전환해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 문하에서 서예가의 길을 걸었다. 보통 서예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데 나중에 시작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옛날 국전(國展)에서 여러 번 입선하고 특선도 하고, 아호를 딴 소정서실(素丁書室)을 차려 후진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서예가 형을 두었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나도 배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보는 건 좋아도 쓰는 건 흥미를 못 느껴 먹을 몇 번 갈아 드린 적은 있어도 결국 못 배웠다.^^ 그래도 글씨체가 나쁜 편이 아니고, 대학부 주보를 손으로 몇 해 만든 걸 보면 장형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긴 하다.

 

아직도 형님댁엔 돌아가신 후 서실에서 황망중에 옮겨 온 수십 점의 유작(遺作)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쌓여 있는데, 유작전까진 아니어도 언제 동생과 날 잡아 형수님과 조카들 있는 자리에서 일일이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보관하기 쉽도록 표구를 해체해서 정리라도 해 두어야겠다. お元氣ですか(오겡끼데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