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흑산>
Posted 2011. 12. 19.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숨어있는책, 눈에띄는책김훈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하나다. 전작주의(全作主義)까지는 아니어도 문장이 특별히 좋거나 마음이 가는 작가를 만나면 그가 쓴 책들을 가능하면 다 사 보려 하는 경향이 내게도 있는데, 일반 작가들 가운데 강준만과 고종석과 더불어 김훈도 그 중 하나다. 거실 책꽂이 한 구석이 10권을 훌쩍 넘기는 그의 칸이니 일종의 가벼운 매니아 정도 된다고 하겠다.
김훈의 문장은 아름답다. 시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어서 당대의 문장 고수들이 누군지 잘 모르고, 널리 알려진 이들 외에 숨어 있는 고수들도 많이 있겠지만, 고종석과 더불어 김훈의 문장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다. 살짝 수줍어 하기도 하고 겸연쩍어 하기도 하면서 구사하는 김훈의 문장이 맘에 든다. 아니, 좀 더 리얼하게 말하자면 끙끙대면서 한 자 한 자 연필로 꾹꾹 눌러 힘들게 쓰는 그의 문장을 좋아한다. 자신이 써 놓고도 자신조차 읽기 힘들어 하는, 옹색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쩐지 끌린다.
그래서 김훈 책은 좋아하면서도 한 번에 다 안 읽힌다. 마치 마음에 둔 여인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맛보아 가는 것인양, 김훈의 문장과 책은 늘 한꺼번에 읽지 못하고 조금씩 분량을 나누어 겨우겨우 이어가며 읽게 된다. <남한산성>도 그랬고, <자전거 여행>도 그랬다. 이번에 나온 <흑산>도 그렇게 겨우 읽었다. 문장이 짧고 날렵해 술술 읽히면서도 몰아서 읽을 수 없는 글. 바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서도 서둘러 읽지 못하는 독서. 독서나 생활에서나 안팎의 답답함을 못 견뎌 하는 성미 급한 나로선 특이한 경험이다.
<흑산>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과 그의 조카 사위 황사영을 중심으로 이땅에서 불과 200여년 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의 흐름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첫 해 1801년 대왕대비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 일어난 신유박해가 작품의 배경이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남양주 조안마을의 사학죄인(邪學罪人)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약현의 사위 황사영 - 한국근대사에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 그리고 흑산도의 장창대, 문풍세, 오칠구, 노비였던 마노리, 육손이, 포도청 비장으로 간자 역할을 하는 박차돌, 여신도 길갈녀, 강사녀 등 등장인물마다 적당히 할애된 비중 있는 역할과 캐릭터는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흑산도에 유배돼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의 날치, 고등어, 청어, 숭어, 장대, 조기, 전복, 갈치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삽화처럼 아름답다.
김훈은 신문기자 출신답게 여러 자료들을 섭렵하고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문장으로 풀고,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해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업을 힘들게 하고 있다. 등장 인물들에 대한 묘사,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도 흐름을 놓지 않는 탄탄한 구성, 그리고 완벽하거나 깔끔떨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마무리하는 그의 소설 어디서나 보이는 특징들이 이번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천주교와 이웃인 개신교 신자로서 이 작품은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왔고, 모르던 사실들을 많이 일깨워 주었다. 선비건 노비건, 남자건 여자건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고, 그들끼리 조심스레 모이고, 노래로 신앙을 퍼뜨리고, 숨어 지내고, 어떻게든 파헤쳐 잡아들이려 하고,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고뇌하는 다양한 인간상들이 출몰한다. 매질과 바다 뱃길, 섬 생활, 세금 수탈 등 시대 풍경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목들은 덤이다.
늘 그러했듯이, 김훈은 이번 작품에서도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좋다. "늘, 너무나 많은 말을 이미 해버린 것이 아닌지를 돌이켜 보면 수치감 때문에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그가 멋있다.
장편소설 <흑산黑山 > (학고재, 2011), 407면. 권말에 참고문헌, 연대기, 낱말 풀이가 실려 있다. 속표지 그림은 작가가 직접 그린 가고가리라는 이름의 상상의 괴수이다. 원양을 건너가는 새, 배, 물고기 그리고 대륙을 오가는 말을 한 마리의 생명체 안으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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