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의 아름다운 글씨들
Posted 2012. 3. 7.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Joy of Discovery이번 주일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슬로우 가든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4시 회의까지 시간이 남아 마침 말로만 듣고 차로만 지나치던 길상사가 근처에 있어 들어간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공교롭게도 주일이라 아침엔 교회를, 오후엔 비록 목적은
다를지라도 어쨌든 절을 가는 조금 이상한 행차를 나선 셈이다.
길상사는 주차장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 놨는데, 꽤 이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망 좋고
공기 좋은 성북동 언덕에 자리잡은 이 절은 전통적인 사찰 분위기를 근간으로 약간 모던한 분위기를
덧입혀 썩 아늑한 공간감을 전달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에 동선이 편해 구경 온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고수의 내공이 느껴졌다. 웬만한 교회들은 이런
분위기, 거의 못 따라온다.
내 눈에 처음 띈 것은 희한하게도 화장실 안내판이었다. 아마 그림을 함께 그려놓지 않았으면
이게 뭐하는 곳인지 몰라 게까지 따라가 봤을 것이다.^^ 훈민정음체로 벽돌에 반듯하게 적어 놓은
정랑(淨廊)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화장실을 달리 부르는 말이라고, 궁금해 하면서 한참 서서 사진을
찍는 내게 길 가던 어떤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부엌은
정재라고 불렀다는 보너스 설명까지 곁들여서.^^ 홈페이지를 보니 불가에서 부르는 말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마당엔 아무런 꽃도 안 보였지만, 의례적인 화단 보호판이 연꽃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아무려면 꽃보단 덜 예쁘겠지만, 정성스런 표지판에서 생명존중의 불교정신을 볼 수
있었다. 잘 만든 표지판이다.
길상사도 템플 스테이를 한다. 좋은 목재를 사용한 안내판은 비록 서울시 로고가 들어가 있긴
해도 폰트와 레이아웃에서 고풍스런 품위와 절도가 느껴지는 썩 잘 만든 디자인이다. 그러고 보면
사찰이나 성당은 한국적인 것을 복원하거나 계승하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하는데 비해, 개신교는
싸구려에 짬뽕에 대규모에 집단적인 천박한 의식만 자랑하는 것 같다. 이들은 Here & Now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There & Then을 추구하기 때문일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어떤 절간에선 간혹 어울리지 않게 스피커로 염불 소리를 내긴 하지만, 대체로 절은 참선 수행에
힘쓰느라 어딜 가나 고요한 편이다. 참선을 영어로 메디테이션으로 옮긴 게 눈에 띈다. 다른 말로는
Quiet Time쯤 될 것이다.^^ 예서 필요한 마음가짐 셋은 말 없이, 소리 없이, 조용히다. 충분히
공감이 된다. 아래 참선 판은 팔면 하나 걸어놓고도 싶다.
이 절엔 오래 된 느티나무를 비롯해 멋드러진 나무가 많았는데, 사람들의 눈길이 많이 머무는
나무를 활용한 말씀들이 군데군데 몇 문장씩 새기거나 적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위적인 느낌도
들긴 하지만, 대체로 나무가 주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멋드러지게 재창조를 하고
있었다. 위 아래 사진 둘 다 오히려 배경이 되는 나무에 눈길이 더 머물지 않는가.
길상사는 재작년에 돌아가신(불문에선 입적했다고 한다) 법정 어른스님이 1995년에 음식점
대원각을 기증 받아 불도량(佛道場)으로 바꾼 곳이다. 그래서 제법 넓직한 경내 곳곳에 스님과
관련된 흔적들이 눈에 띄는데, 스님의 어록에서 발췌한 읽을 만한 글들이 나무 액자 형식으로
전시돼 있다.
그 중 공감되는 두 구절을 찍었다. 위는 성경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고, 아래는
산책과 산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성큼 와 닿는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님의 글솜씨와
소탈했을 사람됨이 느껴진다.
스님의 입적 후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법인 겸 동호회의 현판도 한 건물에 붙어 있다. 다른 건
잘 몰라도 스님 책의 인세 수입을 관리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름값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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