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술
Posted 2015. 10. 4.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행담벼락이나 울타리가 없는데도 풀기둥이 길가에 높이 솟아 있었다.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아래에 타고 올라갈 바위나 나무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거 참 신기하다 하면서 이런 담쟁이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궁금해 가까이 가 두루 살펴보니 비밀이 풀렸다. 당연히 제 혼자 생긴 돌연변이 별종은 아니었다.
첫 번째 힌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주어졌다. 풀기둥이 끝나는 지점에서 공중을 가르는 전선 가락 몇 줄이 보였다. 그 중엔 서로 다른 방향을 달리다 만나 교차해 다시 반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풀기둥은 인터스카이를 찾아 다니던 전선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것이다.
풀기둥으로 좀 더 가까이 접근하자 녀석은 더 이상 위장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두 번째 힌트와 함께 순순히 제 정체를 드러내 주었다. 짐작했던 대로 콘크리트 전봇대가 풀기둥 사이에 숨어 있다가 부시시 맨살을 보여주었다. 커다란 풀잎으로 어찌나 겹겹으로 제 몸을 칭칭 감쌌던지 무심코 옆을 지나다간 전혀 못 알아볼 뻔 했다.
풀기둥이 생기기 시작한 봄부터 몇 겹으로 칭칭 감던 여름을 지나 물들어 가던 가을 세 계절을 녹색 전기를 공급하던 이 기둥은 두어 달 뒤 잎사귀들이 말라 떨어지기 시작하면 몇 달 동안은 무색 전기를 보내게 된다. 그 서너 달 동안은 풀기둥 없이 벗은 몸으로 지내야 하는데, 그 외로운 수고를 잘 감당하고 새 봄이 오면 다시 푸르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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