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과 손봉호
Posted 2011. 6. 27. 00:00, Filed under: I'm churching/교회 나들이나들목교회는 주일예배에서 한 달 또는 두 달 단위로 말씀 시리즈를 개설하는데,
6월 한 달 간은 <평화를 일구는 그리스도인>이란 큰 주제 아래 외부 강사들을 초대했다.
어제 마지막 주일엔 한완상 장로가 <한반도의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
한 장로는 사회학자로 서울대 교수, 통일부총리, 적십자 총재 등을 역임한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1987년 초교파 평신도교회인 새길교회(saegilchurch.or.kr)를 창립해
설교자로 섬겨왔다. 손봉호 장로가 1976년 서울영동교회, 1991년 한영교회 등 교단 안에서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면서 평신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설교자로 봉사해 온 것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확실한 근거도 없어보이는 '강단권'이란 신조어로 주구장창 담임목사의, 담임목사에 의한,
담임목사를 위한 평생설교보장권을 휘둘러 온 교회가 대부분인 가운데 주일 낮예배 설교를
외부 강사에 맡기는 교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은 명분과
적절한 기회를 만들어 종종 주일예배 설교를 외부 강사에게 맡기는 것은 담임목사 자신에게나
교인들에게나 나쁘지 않다.
작년까지 다녔던 한영교회도 비교적 외부 강사가 많았는데, 한두 달에 한 번은 손 장로가
설교하곤 했다. 목사가 아닌 평신도의 설교는 그 자체로도 신선하거니와 학문적, 신앙적
전문성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분이어서 배우는 게 많았고, 회중도 은근히 기대하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한완상 장로와 손봉호 장로는 지나치게 목회자 중심적인 한국 교회 상황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이들이었다. 복음주의권에서는 손 장로와 더불어 돌아가신 김인수
장로와 윤종하 장로 정도가 그 희박하고 인색한 주일 설교 허락권(?)을 얻었던 인물들이었다.
한 장로는 네 가지 소주제 아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성경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했다. 한 장로의 메시지를 두 번째 듣는 iami와 처음
듣는 로즈마리는 홀딱 빠졌다.
1. 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 만들기에 헌신해야 하는가?
2.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평화 만들기에 헌신해야 하는가?
3. 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평화 만들기에 관심이 없고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4. 예수님과 바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달변가였다. 목회자들처럼 특정 성경 본문을 깊이 풀기보다는 전달하려는 주제에 맞춰
자유자재로 성경과 현대사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중간중간 핵심을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비교적 진보 진영으로 알려져 있지만, 복음주의자들이 듣기에도 하등의 손색 없는 내공을
쌓고 있었다.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진보와 보수의 벽이 많이 무너지고 유연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 장로의 메시지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사적 영성(private spirituality)만
아니라 공적 영성(public spirituality)에서도 성장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도 그렇거니와 실상 주기도문도 공적 영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은 신선했다,
또 작금의 한국 교회를 냉전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기괴한 결합으로 바라보는
그의 혜안은 곱씹어 볼만 했다. 하나님에 대한 체계적인 교리만 갖고 있는 근본주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라는 그의 지적은 뼈아팠다.
평신도 설교가 한완상과 손봉호가 미세하게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다 공적 영성을 강조하지만, 손 장로가 절제를 중싱으로 하는 개인윤리에
방점을 찍는 반면, 한 장로는 사회윤리 쪽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 철학과 사회학, 보수와 진보라는
두 사람의 배경이 낳은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 모두 여러 정권의 러브콜을 받은 대표적인 지식인이지만, 손 장로는 끝까지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 장로는 참여하면서 변화를 모색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이건 정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소신과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