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고개에서 벌봉까지
Posted 2012. 1. 23.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
음력 섣달 그믐 전날, 그러니까 설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오후 로즈마리와 은고개 엄미리에서 시작해 남한산성 벌봉까지 갔다오는 가벼운 등산과 산책을 함께했다. 왕복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은고개는 하남과 광주의 경계를 이루는 곳인데, 우리집에서 차로 10분이면 닿는다. 하남에 15년 넘게 살면서도 그 앞 국도변은 숱하게 지나다녔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보진 못했는데, 며칠 전 dong님의 블로그에서 은고개 감나무를 보고 봄이 되면 한 번 가 봐야지 하다가 쇠뿔도 단김에 뺀 셈이다.
등산로 앞엔 오리고기와 영양탕을 파는 음식점이 몇 개 있는데, 닭을 풀어놓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닭이 열 마리는 넘고 스무 마리는 안돼 보였는데, 마당이나 뒷뜰에 더 많이 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색깔이 서로 다르고 개중엔 벼슬이 멋드러진 장닭도 두어 마리 보였다.
등산 안내판은 글씨나 스타일이 구식인 게 오래돼 보였다. 하남도 둘레길을 새로 조성하면서 세련된 안내판과 팻말들을 새로 선보이고 있는데, 이곳으로 해서 오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지 아직 교체되지 않은 것 같다. 솜씨 좋은 이가 손으로 그렸을 이런 고색창연한 안내도가 요즘은 오히려 그립기도 하다.
의안대군 묘소까지는 1km에 30분, 남한산성까진 2.3km에 한 시간, 벌봉까진 2.7km에 한 시간 20분이 소요된다고 나와 있는데, 경험상 벌봉까진 한 시간이면 간다는 계산이 섰다. 로즈마리의 컨디션이 허용하는 지점까지 갔다가 아무 데서나 돌아오기로 하고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하남 위례둘레길 팻말을 만나기까지 말이 등산로지 완만한 산책로와 다름없는 살짝 오르막을 30분 정도 오른 다음 조금 더 가 보기로 했다. 거리로는 반쯤 왔는데, 여기서부터는 거의 오르막이 없는 능선 산책길이라 벌봉까지 갔다 오는 게 별로 무리가 아닐 것 같았다.
중간에 꺾여 부러진 나무가 축구 골대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허들 같기도 한 모양새로 산책객을 맞고 있었다. 저게 보기엔 낮아 보여도 머리 숙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등산객이 없을 때는 산신령들이 나와 족구 한 판 신나게 벌일지도 모르겠다. 저 낙엽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다.
산악 동호회들마다 리본을 걸어놓았는데, 강동에 위치한 산 10개를 종주하는 산악대가 있는 모양이다. 검단산, 용마산, 예봉산, 운길산 등이 예 속할 것이다. 산 10개를 묶어 종주하려면 며칠이 걸릴 테고, 1박2일로 서너 개 산 오르내리는 건 이들에겐 일도 아닐 것이다.
중장거리종주등거대(끝에서 두 번째는 모르는 한자라 정확한 음을 모르겠다) 리본은 이번에 처음 봤는데, 나처럼 반나절 산행이 아니라 중장거리를 찾아 다니는 산악대인 모양이다. 체력도 대단하겠지만, 산행 계획을 짜고, 대원을 모집하고 실제로 등산에 나서는 등의 팀워크가 보통이 아닐 것 같다.
둘레길에 접어든지 얼마 안됐는데 눈발이 뿌려대기 시작한다. 기온은 영상인 것 같은데 비가 아니라 눈이 나리니 기분이 묘하다. 그렇다고 옷이나 머리가 젖을 정도의 진눈개비는 아니고 싸리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진을 본 둘째가 가루눈이라고 이름붙였다.
가루눈, 실제로 이런 이름이 있는지 모르지만 불러볼수록 예쁜 이름이다. 산성 가까이 갈수록 가루눈이 제법 내려 낙엽더미와 부러진 고목들에 살짝 쌓였다. 마치 설탕을 뿌려놓은 것처럼 얹혀 있는 게 쌓인 눈하고는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오늘의 목적지 남한산성에 도달했다. 벌봉은 조금 더 가야 하는데, 눈도 오고 또 가서 봐야 딱히 볼품도 없는 바위라 산성 안을 10분 정도 걷다가 다시 내려왔다. 남한산성 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문이나 남문, 북문쪽과는 달리 동문에서도 한참 더 들어와 외진 데 있는 이곳 산성 담벼락은 많이 무너져 쇠락한 기운을 보였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부터 보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여긴 산성이라 하기엔 다소 초라해 보이고 볼품없어 보였다. 기왕 늦은 거 너무 현대적으로 판박이 보수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세월의 풍상을 오롯이 겪어낸 흔적을 간직하는 적절한 보존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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