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5 - 최명희 문학관
Posted 2011. 8. 23. 00:00, Filed under: I'm traveling/하루이틀 여행
두어 해 전, 전주예수병원의 기념출판작업을 돕기 위해 갔다가 한옥마을에서 근사한 한정식을 대접 받고 차를 마시러 나오는 길에 최명희 문학관을 지나게 되었다. 저녁때라 문이 닫혀 있어 다음에 한 번 와야지 했는데, 그후 강의 등으로 두어 번 더 내려갈 일이 있었지만, 구경을 못했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우리는 위에 보이는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갔는데, 넓은 마당을 낀 멋진 한옥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아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 잘 모르는 관광객들도 선생(1947-1998)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훑어볼 수 있도록 상당한 분량의 자필원고, 서신, 기고한 잡지 등을 중심으로 잘 전시돼 있고, 지하에는 전주 문인들을 위한 세미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선생의 대표작은 <魂불> 10권이다.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동안 집필하고 연재한 대하소설로, 일제 때 가문을 지키려는 양반가 종부 3대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선조들의 정신과 숨결, 염원과 애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을 생생하게 복원해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류 소설가로는 박경리, 박완서와 함께 몇 손가락에 꼽히는 큰 작가다.
선생의 소설이 나오고나서 한 사람 혹은 한민족의 핵, 삶의 불꽃이 되는 정신을 뜻하는 '혼불'이란 단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름만 듣고 있었을 뿐 아직 읽진 않았는데, 로즈매리가 읽을 마음이 생겨 그참에 함께 읽게 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글쟁이 중 하나인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최일남은 혼불에 대해 "미싱으로 박아댄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함 땀 한 땀 뜬 이바구"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오십을 갓 넘기고 아깝게 유명을 달리했는데, 도처에 자리잡은 혼불 매니아들이 그 문학정신을 기리고 아쉬워 하는 모임을 계속 갖고 있으며, <혼불>을 주제로 한 국문학과 석박사 논문도 수십여 편 나왔다.
전시품 중 한켠에 선생이 즐겨 사용하던 문방오우(文房五友)가 말없이 손님들을 맞는다. 만년필, 칼, 가위, 대나무자 그리고 철끈이다. 요즘처럼 컴퓨터 자판으로 글을 치지 않았던 그 시절 작가들의 애용품이었을 것이다. 만나뵌 적은 없어도 기록하고 보관하는 데 철저했던 선생의 깔끔한 성품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사백년 전 시인 고산 윤선도는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다섯 친구(五友)라 부르며 <오우가>란 멋진 연작 시조를 남겼다. 문인은 아니지만 내 다섯 친구는 무엇일까. 책, 산, 맥북, 디카, 블로그 쯤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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