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불
Posted 2014. 2. 8.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
지난 달 모락산 등산로 스탠드 이정표 한 면이 눈에 덮여 새하얗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왔어도
사각 기둥의 다른 면들은 멀쩡한데, 그 면만 눈 세례를 받은 것처럼 흰 칠을 했다. 지금 보이는
면은 출발 지점에서 얼마 만큼 왔다는 정보를 보여주는데 비해, 눈에 덮인 면은 정상까지
700m 남았다는 화살표가 그려 있었다.
보통 때라면,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등정(登頂)을 위한 산행이었다면 아주 요긴했을 이 정보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고 갑갑해 하는 이들은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털어낸 다음 거리와
방향을 확인하겠지만, 이미 이쪽 코스에 익숙하고, 가벼운 눈길 산책에 나선 내겐 그럴 하등의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각 기둥의 다른 면들은 멀쩡한데, 그 면만 눈 세례를 받은 것처럼 흰 칠을 했다. 지금 보이는
면은 출발 지점에서 얼마 만큼 왔다는 정보를 보여주는데 비해, 눈에 덮인 면은 정상까지
700m 남았다는 화살표가 그려 있었다.
보통 때라면,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등정(登頂)을 위한 산행이었다면 아주 요긴했을 이 정보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고 갑갑해 하는 이들은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털어낸 다음 거리와
방향을 확인하겠지만, 이미 이쪽 코스에 익숙하고, 가벼운 눈길 산책에 나선 내겐 그럴 하등의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보를 감추고 있었지만, 새로운 표정으로 서 있다는 게 오히려 볼만 했다. 다른 면들은
멀쩡한데, 여기만 주위의 나무들과 바위 그리고 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눈에 덮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 하는 게 슬쩍 읽혀져 가볍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무와 바위와 길이야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맞다 보면 저절로 쌓이면서 덮이게 마련이지만, 서 있는 이 기둥이 저렇게 눈을
이불 삼으려면 얼마나 떨어지지 않으려 견디고 달라붙어 있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을까.
이정표의 하얀 눈 이불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보는 이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르고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나는 눈길 산책에 나섰으니 앞길 너무 재려 들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감흥을 느끼고 컨디션이 좋으면 좀 더
올라가도 좋고, 이쯤에서 내려가도 그만이지만,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밟고 서 있는 풍경을
즐겨 보라는 데에 생각과 느낌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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