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테이블 마운틴
Posted 2010. 10. 29. 14:49, Filed under: I'm traveling/Wonderful CapeTown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그 중에서도 남서단에 있는 세계적인 관광지 케이프타운에 가면 세 가지를 봐야 한다고 한다. 유명한 희망봉과 만델라가 18년간 살았던 첫 번째 감옥이 있는 로벤 섬, 그리고 이 도시의 랜드 마크 테이블 마운틴.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은 이 도시의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이는 장관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로잔대회가 열린 컨벤션 센터와 호텔을 오가는 시내 어디서도 이 산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 위에 이렇게 흰 구름이 낀 날은 흰 식탁보를 차렸다고도 하고, 신들이 산 위에서 회의를 한다고도 했다.
어찌 보면 로잔대회에 참가하는 것만큼이나 떠나기 전부터 내 마음을 들뜨게 하고 설레이게 만든 테이블 마운틴은 가 보니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버킷 리스트(Bucket List)로 꼽을만 했다.
두 주간 케이프타운에 머물면서 케이블카를 타고 한 번, 호텔에서부터 걸어서 정상까지 한 번, 주차장에서부터 산 중턱 둘레길로 한 번 해서 도합 세 번을 갔다. 아래 사진은 이 산과 붙어 있는 사자 머리(Lion's Head)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오른쪽 정상부 튀어나온 데가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대부분은 차로 주차장까지 와서 왕복 190랜드(3만3춴원) 내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는 테이블처럼 생긴 정상부를 거닐며 한 시간 정도 머물다 오곤 하는 것 같았다.
주일 오후에 시작한 로잔대회는 수요일까지 하고 목요일 하루 쉬고 다시 금요일부터 주일 밤까지 이어졌는데, 이 휴식일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리자마자 어깨 가방에 물 한 병과 팩쥬스 하나, 그리고 디카만 넣고 출발했다. 내내 한 방을 쓴 고 선교사에게는 12시쯤 돌아올 거라 했더니, 1시까지 안 오면 경찰에 신고하겠노라는 농담을 하며 다시 잠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도대체 이 먼 곳까지 와서, 그것도 여행이나 관광이 아닌 대규모 국제회의장까지 와서 꼭두새벽부터 동행도 없이 여행자의 호기심과 무모할 정도의 치기로만 무장한 채 길을 나섰는지 나도 모르겠다.
호텔에서 케이블카 정류장이 있는 주차장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그것도 몇이 떼로 달려들어 위협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꼭꼭 감춘 채 한적한 거리를 지나 이어지는 멋진 주택가들을 구경하면서 드디어 1차 목적지인 산 입구 주차장에 도달했다.
노란색 화살표에서 케이블카를 타는데, 그 위로 그려진 흰색 등산로를 따라 걸어도 되고, 왼쪽으로 난 까만색 차선을 따라 15분 정도 걸은 다음 다시 흰색 등산로를 택해도 됐다. 노점 주인에게 물어 후자를 택했다. 꾸불꾸불한 등산로가 끝나 산 표시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게 오늘의 미션이다.
여기 등산을 하면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가운데 혼자 가지 말고 여럿이 함께 가라는 등 몇가지가 준비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호기 있게 고고씽.
등산을 하기 전에 유심히 들여다 본 안내판엔 유독히 반복 강조되는 구절이 있었다. At Your Own Risk! 전적으로 네 책임이란 말이다. 야박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이든 등산이든 각자 알아서 철저히 준비하고, 페이스를 조절하고,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풍향계 비슷하게 그날 그날의 날씨를 중심으로 산행 안전도를 표시해 주는 안내판이 1단계 안전은 아니지만, 2단계 무난하다고 가리킨다. 3단계 위험, 4단계 매우 위험, 5단계 극한 상황 가운데 하나였으면 산행을 통제하거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테이블 마운틴은 케이블카가 아닌 걸어서 오르는 데만 300개 정도의 길이 있다는 큰 산이다. 그 중 내가 간 코스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두어 가지가 있는데, 노점 아저씨에게 일반적인 추천코스를 물어 플랫트클립 협곡(Platteklip Gorge, 1050m)을 택했다. 하산길에 이 분에게 멋진 카우보이 가죽모자를 케이블카 값으로 샀다. 앞으로 내 산행과 함께할 것이다. 가다가 중간쯤에 갈림길이 나왔는데, 이름도 무섭게 악마의 봉우리(Devils Peak)로 가는 길도 있다.
남아공엔 의외로 산이 많았는데, 대부분 나무가 별로 없는 돌산들이다. 가까이 가 보니 마치 시루떡처럼 바위가 켜켜이 얹혀 있다. 저길 어떻게 올라가지 하는데, 산은 찾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환대를 베푼다. 한국과는 달리 흙과 나무 계단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돌과 바위가 놓여진 길이 나 있었다.
도로가 끝나고 등산로가 시작되는 오르막부터 정상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는데, 검단산과 모락산에서 쌓은 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신발이 등산화가 아닌 워킹화라는 게 걸렸지만, 조심조심 오르니 큰 부담은 안 됐다.
경사가 계속돼 물이 고인 계곡은 없었지만 폭포가 있어 반가웠다. 나무는 적었지만 군데군데 이 돌산에도 예쁜 꽃들이 수수한 자태를 수줍어 하며 드러내고 있었다. 폭포와 꽃을 보면서 비로소 새벽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에 작은 여유와 탄력이 생긴다.
산이라면 어디든지 발자취와 흔적을 남기는 이들이 있게 마련인지 군데군데 바위마다 이 산을 찾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개중엔 원시인들처럼 그림도 남겨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름과 날짜 정도면 족한데, 어떤 데는 꼭 나라 이름까지 적어 놔 욕하게 만드는 애들도 있다. 이런 바위가 몇 개 있었는데 Korea도 한 번 봤다.
초행길이고 우리네와는 달리 안내 표지판이 별로 없어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얼마나 남은 건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할 때쯤 안개가 걷히면서 산 정상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V자로 깊이 패인 곳까지 오르면 뭐가 나오더라도 거의 다 오른 셈이지 싶었다.
내 셈이 맞았다. 몇 차례 지그재그로 돌계단길을 오르니 정상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행히 V자 계곡이 끝나는 부분이 바로 정상이었다. 그리고는 산 이름 그대로 사방으로 테이블이 펼쳐져 있는 고원지대가 이어졌다.
천 미터가 넘는 산, 그것도 아프리카 남단에서 등정의 기쁨을 느끼고 누리기에 앞서 세찬 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할 때 흐린 날씨는 아니었지만 봉우리에 오르니 갑자기 심한 안개가 몰려오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다.
정상부 안내판에 보니 여기서 케이블카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데, 이왕 온 김에 게까지 갔다올 생각으로 10분쯤 갔지만, 절벽이 이어지고 보행로가 확보되지 않아 왈칵 겁이 났다. 아쉽지만 중간에 발을 돌려야 했다.
그래! 이만해도 대단한 거야! 바람이 없었다면 조금 기다렸다가 길을 찾아 케이블카 정류장까지 가서는 올라온 길을 아래로 내려보며 폼나게 타고 내려올 요량이었지만, 이젠 경찰에 신고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아래 주차장까지 다시 걸어 내려와야 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P.G. 봉우리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날리고 서둘러 내려왔다. 똑같은 길을 오르내리는 게 아쉬웠는데, 중간쯤에 이 산을 평평하게 끼고 돌아오는 길이 있길래 그 길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 둘레길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그 풍경은 아무래도 다음글에서 이어야 할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11시 반. 모자를 산 노점 아저씨가 추천하는 리키란 청년이 모는 인도산 타타 브랜드 택시를 기다렸다가 싸게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모두들 놀라고, 믿으려 하지 않고, 부러워들 했다. 사자머리는 예닐곱 명이 자주 갔지만, 테이블 마운틴 등산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아 화제가 됐다. 결국 한국에 오는 날 새벽에 여섯 명이 테이블 마운틴 둘레길을 걷게 된다.^^
아래는 거의 매일같이 오른 사자머리봉 정상에서 테이블 마운틴을 배경으로 누군가 찍어준 것이다. 암만 봐도 멋있다. 테이블 마운틴도, 그리고 iami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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