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에서의 한 달>
Posted 2024. 12. 28.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숨어있는책, 눈에띄는책
계절에 한 번 꼴로 교회에서 다섯째 주일에 모이는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Met 경비원, 8/19/24>에 이어 다룰 책은 리비아계 영국 작가 히샴 마타르(Hisham Matar, 1970- )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 A Month in Siena>(열화당, 2024)이다. 내가 읽자고 한 바람에 다른 때보다 열심히 읽고, 저자의 2017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귀환 The Return>(돌베개, 2018, 아쉽게도 절판됐다)도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고 이것저것 레퍼런스까지 훑어봤다.
피렌체 아래 있는 시에나에 한 달 머물면서 골목을 걸어다니고, 미술관들을 다니는 단순한 기록인데, 남다른 구성과 스타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책이다. 카다피 독재정권 하에서(1969-2011) 반체제 운동을 이끌던 아버지가 체포, 구금, 행방/생사 불명되는 풍파와 트라우마를 겪은 가족사에, 그림 한 점을 오랜 기간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독특한 감상법에, 뛰어난 필치가 뒷받침되어 160면 남짓한 문고판이지만 묵직한 감동을 준다.
캄포 광장에 있는 푸블리코 궁전의 테니스장만한 세 면을 장식하는 로렌체티의 커다란 프레스코화 <좋은 정치의 알레고리> <도시/시골에서의 좋은 정치의 결과>를 중심으로 여러 미술관을 다니며 시에나 화파의 그림들을 소개하는데, 이 책이 아니었다면 관심도 없었을 시에나에 부쩍 흥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작품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망명자로서의 죄의식은 유려한 필치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독자들을 흡인하고, 충분히 여러 상을 받을 만한 빼어난 작가라는 걸 알게 한다. 리비야가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 남부 이탈리아가 아주 가깝다는 역사와 지리적 상식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마침 해인이도 얼마 전에 우리 상황과 맞물리는 리뷰(12/15/24)를 썼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대체로 한 그림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매주 새 그림을 골랐다. 한 번에 하나씩 그림을 보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바라보다 보면 그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그림으로 옮겨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동안 그 그림은 내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된다. (13면)
버스가 떠나자마자 아내가 그리워졌다. 언제나처럼 재빠르고 짙고 무거운 고독이 찾아왔다. 고독에게는 시간이 많다. 사람이 홀로 있으면 시간은 양쪽으로 창이 난 방이 되어 한쪽으로는 과거를, 다른 쪽으로는 미래를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현재는 상상력을 압도한다. 쉬지도 지치지도 않는 이 진행성. (5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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