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1- 한옥마을의 멋스런 간판들
Posted 2011. 8. 19. 00:04, Filed under: I'm traveling/하루이틀 여행전주 한옥마을은 700여 채가 남아 있는데, 이틀간 느릿느릿 다니면서 든 솔직한 느낌은 딱히 손에 잡히지 않고 뭔가 아쉽고 거시기했다는 것이다. 서울의 북촌과는 다른 멋지고 고풍스런 마을을 기대했는데, 8월의 폭염 탓에 건성으로 겉핥기만 해서였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다소 어수선하고 미스매칭된 풍경에 조금 실망했다.
그런 가운데서 위안이 된 것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간판을 내건 멋스런 카페들이었다. 대개는 한옥을 개조했지만, 어떤 것은 아예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곳도 있었다. 파리 날리는 집도 있었지만, 어떤 집은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옛 고 새 신, Old & New 고신은 한글과 한자 그리고 영어를 바탕색을 달리해 썼는데, 스타일리시한 감각이 느껴졌다. 옛사람들이 이 거리에 오면 신고라고 오른쪽부터 읽을지도 몰라 한글로 작게 적어 놓았다.^^ 숙박도 겸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단정하고 기품 있어 보여 맘에 들었지만 방을 한 번 볼 수 있겠느냐에 묵기로 결정하면 보여주겠다길래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렸다.
찌는듯한 팔월 폭염으로 몸이 축 늘어지면서 발걸음이 무거운데 봄 카페, 아니 공간 봄은 어두운 여름밤 속에서도 은은한 자태를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좋아진다. 한글도 이렇게 정갈한 맛이 느껴지도록 쓸 수 있다.
한옥마을 카페들은 다른 데처럼 간판이 보이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만들지 않고, 시골의 장점을 살려 작은 정원이나 올레를 몇 걸음 걸어 들어가는 구조가 많았다. 정원에 들어서자 얼핏 듣기에도 질 좋은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선율이 카페 이름만큼이나 정갈하게 밤하늘에 울려퍼진다.
이 동네에는 손글씨 맛을 살린 간판들이 많았는데, 돋을새겨 놓은 것들도 있지만 개중엔 이렇게 움푹파 놓은 간판들도 눈에 띄었다. 글씨체가 꼭 어렸을 때 미술 시간에 처음으로 조각을 배울 때 조심조심 나무를 파내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혼자 씩 웃어주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여행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집은 특별히 작명상을 주어도 좋을 듯한데, 마닐마닐은 음식이 씹어 먹기에 알맞도록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는 우리말이다.^^ 전주 한옥마을 카페로는 딱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현판 색도 다홍치마 색으로 한껏 멋을 냈다.
카페 이름이 반갑다. 기쁜 소식, 복음(福音)을 무슨 배경으로 내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다.^^ 시옷은 하나로 두 글자를 날렵하게 커버한다. 위에는 나무 문양을, 아래에는 아세헌이란 한옥숙박체험시설 이름과 주소를 멋스럽게 새겨놓았다. 전체적으로 대문과 담과 썩 잘 어울리는 수작이다.
처음엔 무슨 천주교 영세명인 줄 알았다. 루갈다라는 성인이 있나 보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차(茶)를 몹씨 마시고 싶은(渴) 집(樓)이라는 다갈루(茶渴樓)를 거꾸로 내건 집이었다. 뭐, 물어본 건 아니고 내 추측이니까 틀릴 수도 있지만, 난 그렇게 읽기로 했다.^^ 흘려 쓴 한글이 마치 한자로 치면 행초서 느낌이 난다.
찻집들 사이로 파스타 파는 집들이 몇 곳 있었는데, 처음엔 한옥마을에 생뚱맞게 웬 파스타 했지만, 꼭 비빔밥만 먹을 일은 아니고 한옥과 파스타의 퓨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은 그런 집 가운데 하나였는데, 괜히 만이천원 내고 비빔밥 먹을 게 아니라, 넓은 통창으로 한옥마을 감상하면서 파스타 먹는 것도 별미였을 것 같다. 접시를 사이로 허공에 매단 포크와 나이프가 낮은 기와지붕 얹은 담과 올레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들어간 카페는 이 멋스러운 찻집들이 아닌 블루란 현대식 카페였다. 미술가 주인이 하는 럭셔리해 보이는 집인데, 아침 먹고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있다는 경기전(慶基殿)을 돌아보고 숙소로 오는 발걸음이 너무 지쳐 마침 눈에 띈 집이다. 전주 커피가 아닌 만천원이나 받는 팥빙수를 시켰는데, 그 정도 받을 맛과 양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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