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정상
Posted 2012. 4. 24.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비가 안 왔더라면 상춘(賞春) 등산객들로 바글바글했을 검단산을 주일 오후에 올라갔다.
멀리서 봐도 봉우리엔 안개가 덮혀 있는데, 이런 날이 산에 오르긴 더 편하다. 사람도 없고
땀도 거의 안 나는데다, 풍경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깊고 울창하진
않아도 비를 맞은 검단산엔 어느새 연두와 초록이 가득했다.
토요일 하루 종일 봄비 치고는 꽤 많이 내리더니 주일 오후가 되자 맞아도 무방할 정도로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토요일엔 우중(雨中)산행을 해야 했겠지만, 오늘은 한 끝만 다른
무중(霧中)산행이다. 안개는 올라갈수록 짙어졌다. 안개비는 옷을 적시진 못했지만, 세 시간
가까이 모자를 안 쓴 머리를 적실 정도로 물기를 맺혔다.
예상했던 대로 검단산 정상엔 아무도 없었다. 날이 좋았다면 휴일 4시 반이 조금 지난
지금쯤이면 넓은 정상 여기저기 적어도 이삼십 명은 앉아 있거나 서서 사방 팔방 경치를
보거나 사진 찍고, 정상주로 목을 축이고 있을 텐데, 아무런 흔적과 자취도 안 남아 있었다.
검단산 정상엔 서울 방면과 남양주-양평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데크가 두 개
있는데, 풍경을 당겨볼 수 있도록 망원경도 두 개 설치돼 있다. 처음 이 산에 오른 이들은
망원경으로 자신이 온 곳이나 아는 곳을 이리저리 당겨보면서 기뻐하곤 했는데,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으니 완전히 개점휴업 상태다. 하긴 오늘 같은 날엔 누가 와서 눈을 대고
당겨보더라도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쓸쓸함을 더하려는지, 마침 정상에 그려놨던 주변 안내도마저 낡아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져 있다. 신록 오월에 다시 오면 최신형으로 바뀌어 있을 것 같은데, 덕분에 지난 몇 년간
이 산에 올 때마다 숨을 돌리면서 보고 또 봐서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지리와는 제법
익숙해졌다.
비가 안 왔더라면 어제 오늘 정말 대박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정상주와 하드를 파는
이에겐 날씨가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띄엄띄엄 올라오는 이들 맞이하다가 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정상을 몇 걸음 안 남겨두고 있을 때 철수를 시작했다. 하긴 이런 으스스한
날씨에 막걸리와 아이스케키가 팔릴 리가 없을 것이다. 장사는 공쳤어도 그는 오랜만에
이른 주말 퇴근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이런 날씨, 이런 시간에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 어쩌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우중산행이건 무중산행이건 감행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정상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1-2분 사이에 이쪽에서 두 사람, 저쪽에서 한 사람이 정상을 밟았다. 내가 내려가면
쓸쓸했을 것 같았는데, 괜한 걱정을 했다.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하산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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