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 개량 청계천 판잣집
Posted 2012. 4. 4.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청계천을 걷다가 9가 지나서 천변 도로 위에 오십여 년 전 청계천 판자촌을 재현해
놓은 곳이 보여 올라가 봤다. 요즘 재료로 지어선지 2층으로 된 외양은 번듯해 보인다.
전체를 한 채로 안을 연결해 놓은 이 집 정도면 방 하나에 온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살던
그때는 족히 열 가구는 살만 했을 것 같은데, 겉만 봐선 그 시절이 제법 낭만적으로 보이면서
이런 데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애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 번 살아볼텨?!
그도 그럴 것이, 판자를 너무 괜찮은 걸 썼다. 그 당시는 공사판의 쪽나무, 아니 그것도
귀해 산에서 대충 가져온 나무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모양도 제각각이고, 저렇게 빈틈없이
멋있게 짓지 못하고 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허술한 구조였을 것이다. 똑같은 판자 구하기도
어려워 그야말로 중구난방 다양다채로웠을 텐데, 여긴 미니 펜션 분위기다.
한 시대가 지나 과거를 재현한다고 해서 꼭 그 때 그대로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오십대 이후의 사람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는 풍경이라면 좀 더 리얼리티를 살려 재현해
놨으면 좋았을 법 싶었다.
다행히 안에 전시하고 재현해 놓은 물품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추억의 물건들, 이름들이
여럿 눈에 띄어 반가웠다. 미원(풍) 봉다리, 각설탕 박스, 팔각 성냥통, 껌 진열대 등 아련한
옛날 물건들이 잊고 있던 기억의 저편에서 모락모락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분유통도 보이는데,
사실 우리 어릴 적엔 분유 먹고 자란 애들이 거의 없었고, 조금 지나서부터야 가능했다.
기왕이면 그때 통용하던 지폐와 동전들까지 한곳에 전시하고, 당시 물가를 알 수 있도록
대표적인 품목들은 값을 벽에 표로 만들어 요즘과 비교할 수 있게 해 놨으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 청계천 하드웨어 공사를 서두르느라 공무원들에게 미처 그런 여유가 없었나 보다.
당시 국민학교 교실 풍경도 새롭다. 역시 책상과 풍금도 당시 쓰던 것으로 갖다놨으면
좋았을 텐데, 한참 뒤에 쓰던 괜찮은 것들이다. 양은 도시락(벤또라고 불렀던) 데워 먹던
난로엔 저렇게 몇 개가 포개 있곤 했었지. 그도 못하면 더운 물 말아먹기도 했었고(난로를
비롯해 벤또와 주전자가 너무 쌘삥이라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게 흠이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물건이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이런 걸 아나 모르겠다. 가스렌지가
보급되기 전, 연탄불과 함께 취사용으로 집집마다 애용했던 곤로 되시겠다. 저 후지카 곤로가
유명했다. 요즘 브랜드로 치자면 린나이나 동양매직 정도 되는 거다. 곤로 위에 양은 냄비를
얹고 라면 끓여먹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신문 안 보는 집이 많아졌지만, 옛날엔 집집마다 신문이 왓따였다. 아쉽게도
일이십 년 전부터 이류신문으로 전락했지만, 6, 70년대만 해도 넘버 원을 구가하던 누런
동아일보 뭉치가 눈길을 잡아끈다. 1972년 신문들인데, 헤드라인이 재미있다. 그때만 해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몇 백 불이 채 안 됐나 보다. 미쿡 대통령에 재선된 닉슨은 다음해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물러나야 했다. 요즘 우리도 사찰이 이슌데..
웃기는 건, 이 해 가을에 박통의 시월 유신이 시작됐는데, 신문들이 마치 초등학교처럼
표어를 제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하의 동아일보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는지, 아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유치찬란한 슬로건을 신문 대문에 매일같이 내걸고 있다.
국민을 진짜 궁민으로 알았던 우리 세대가 겪은 슬픈 자화상 중 하나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언론을 통해 국민을 계도하려 했고, 이런 게 어느 정도 통했던 슬픈
시대였다. 지들 입맛에 맞도록 언론을 통제하려는 통치 세력들과 그에 빌붙어 되지도 않는
용비어천가를 대명천지에 읊어대는 앵무새들이 요즘도 있고, 그래서 언론사들의 파업은
멈출 수 없는 숙명이다.
개량 판자촌 전시관에서 20%쯤 부족한 당시 분위기가 못내 아쉬웠는데, 다행히 경찰이
만든 낡은 표어에서 빵 터졌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오랫동안 <고바우>를 연재했던 김성환
화백이 그린 <청계천의 밤> 그림을 확대해 걸어놔 반가웠다.
당시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 이 그림은 열림원에서 낸 <고바우 김성환의 판자촌 이야기>에
수록된 목판화풍 풍속화인데, 검색해 보니 아뿔사! 2005년에 나온 책이 벌써 품절됐다네.
그래! 전시관의 업그레이드된 판잣집이 아니라 이런 게 리얼한 청계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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