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화장실
Posted 2013. 2. 7.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Joy of Discovery
간판이 안 붙어 있었다면 여기가 화장실 앞에 늘어선 줄이란 걸 바로 알아차릴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로 치면 명동이나 강남역쯤 되는 오클랜드 다운타운의 북적거리는 샵들 사이로 독특한 디자인의 공중 화장실 앞에서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재작년 11월 마지막 주일 오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두고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시끌벅쩍한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막 끝났을 때였다.
이쯤 되면 매우 예술적인 화장실로 봐줄 만 한데, 마음은 조금 급할지 모르겠지만, 서 있는 폼이나 표정들은 화장실 대기 행렬로 보기엔 조금 아까울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고 자유분방했다. 거리의 화장실은 보통은 건물 안에 있어 이렇게 노출돼 있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던 터라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남녀가 섞여 서 있는 걸로 봐서 남녀 화장실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한 번에 한 사람씩 이용할 수 있는 1인용인듯 싶었다. 급한 이들을 위해 들어가 보진 않아 아쉽게도 내부는 못 봤는데, 겉이 이 정도면 안도 나쁘진 않았을 것 같다. 일단 외양은 A급.
가끔 약간 고급스런 건물에 있는 화장실, 그 중에서도 디자인에 조금 신경 쓴 건물, 예를 들어 미술관이나 레스토랑 화장실은 이용하기가 조금 미안할 정도로 시각적으로 잘 만들어 급히 볼일을 보려던 소기의 목적을 잠시 잊고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꼭 돈을 많이 들여 고급스런 자재로 꾸민 곳이 그런 인상을 주는 건 아닌데, 그런 곳들은 돈질밖에 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살짝 아니꼬운 마음에 시원하게 볼일부터 보는 경우가 많다.^^
돈이 아니라 안목과 정성인데, 오클랜드 미술관(Auckland Art Gallery) 화장실이 그랬다. 마젠타와 짙은 그레이 톤의 타일로 콘트라스트를 이룬 벽면은 심플하면서도 클린해 들어서는 순간 주춤하면서 순간적으로 옷매무새를 고쳐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키가 커서 자연히 우리보다 조금 높게 설치해도 무방한 변기마저 낮게 설치해 안정감을 준 게 정말 맘에 꼭 들었다.^^ 화장실이 이 정도니, 이 미술관의 컬렉션이나 전시 안목은 말 안 해도 될 것이다.
공공 시설만 아니라 가정집의 평범한 화장실에서도 가끔 아늑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작년 가을 코스타를 마치고 강사들과 여행하며 묵었던 로토루아 산장의 화장실 풍경은 소박하기 그지 없었다. 반투명 격자 무늬 유리창과 그 앞에 놓인 꽃꽂이 화분,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할 두루마리 화장지까지 꾸미지 않아 자유분방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깔끔하게 관리하는 곳이란 느낌을 주었다. 아쉽게도 그날 밤 암반수 끌어올리는 시설이 고장나 볼일 보는 데 약간 난감했던 일만 빼놓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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