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산책
Posted 2013. 4. 3.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출근 전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 내렸다. 오늘은 점심 산책이 어렵겠거니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10시쯤 되면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야지. 땅이 질 수도 있고, 중간에 다시 비가 올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야지.
다행히 큰 비가 아니어서인지 땅은 거의 질지 않았고, 사인암을 오르내리는 내내 비도 안 왔다. 오히려 땅이 질 거라 생각하거나 일기가 안 좋다는 생각에 등산객이 거의 없어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 가지들이 반겨주었고, 비 온 뒤에 약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공기는 내딛는 발걸음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지난주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생강나무 꽃들이 더욱 생생한 표정을 지어 주었고, 종이처럼 얇게 껍질을 벗어대는 물박달나무가 아직 녹색을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산길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사인암에 오르니 온통 비안개로 덮여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저 앞이나 아래로 아무것도 안 보여서인지 순간적으로 빙빙 도는 것 같은 은근한 공포감이 찾아왔지만, 깊은 숨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자 이내 안정이 됐다. 3백 미터밖에 안 되는 높이라 비안개로 뿌연 거였지만, 기분은 마치 천 미터쯤 되는 봉우리 위에 서서 아래로 펼쳐지는 운해(雲海)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날이 좋은 날이라면 왼쪽으로 수리산부터 가운데 관악산, 오른쪽으로 청계산이 보일 텐데, 비안개는 두꺼운 커튼처럼 온통 이들을 가렸다. 멀리는 안 보여도 바로 아래 나무숲이 머리를 내밀어 수묵화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컬러 사진인데도 어두운 갈색 분위기의 세피아 풍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연중 이런 느낌을 맛보게 하는 산행도 그리 흔치 않다. 산은 늘 준비하고 있고 날씨가 받쳐주더라도 때 맞춰 산에 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장마 뒤나 예상치 못한 급변하는 날씨에 때마침 산에 오르고 있었다거나 할 때 몇 번 맛볼 뿐이다. 이래저래 산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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