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장의 모더니티
Posted 2016. 4. 8.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숨어있는책, 눈에띄는책
아주 재밌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작년 여름에 나온 책인데, 저자와 출판사도 낯선데다 앞표지엔 책제목도 안 써 있는 희한한 책이었다. 옛날 잡지 화보 같은 앞표지와 무슨 공장이나 창고처럼 보이는 뒷표지에 실린 사진 위론 여러 색의 들쭉날쭉한 그래프를 굵게 그려놓아 조금 정신없어 보이게 만들어 놓았다(게다가 그래프 부분은 꺼끌꺼끌한 느낌을 준다).
물론 책등엔 제목과 저자, 출판사를 표시해 놓았는데,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란 제목이 정신 없어 보이는 표지 이미지와 딱 어울렸다. 이 정신 사나워 보이는 책을 쓴 박해천은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나온 공대 계열의 디자인 연구자로 경북 영주에 있는 동양대학 - 진중권이 이 학교에 있다 - 교양학부 테크노에틱 연계 전공(이런 전공 처음 들어본다^^) 조교수라고 책날개에 소개돼 있다.
나는 처음 듣고 처음 읽은 저자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2011), <아파트 게임>(2013)에 이은 콘유(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 완결판이었다. 전작들을 읽지 않고 최근작부터 읽은 셈인데, 책 제목들만으로도 저자가 무얼 생각하고 쓰는 이인지 대충 짐작은 된다.
낯설어보이고 정신 없어 보이는 이 책은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책다방 시즌2>를 들으면서 알게 됐다. 말을 무척 잘했는데, 듣다 보니 흥미가 생겨 책도 사 보게 된 것이다. 읽기 전에 본문 디자인이 아주 맘에 들었는데, 요즘 책답지 않게 첫 행을 잔뜩 위로 올리고, 뒤흘리기를 하면서 한 면에 28행을 꽉 차게 배열한 게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요즘 웬만한 책은 22-23행 정도로 아주 널널하게 배열해 낭비가 심하고 품위가 없어 보인다).
40면에 걸쳐 한국전쟁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일종의 생활사 또는 미시사(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회 풍경을 모더니티라 부르면서,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등장한 한국 사회의 여러 문물들 가운데 2층 양옥, 포니 자동차, 신도시 아파트, 이마트 등을 화두 삼아 중산층의 사회 단면도를 6개의 아수라장으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데, 거의 누구나 거쳐왔거나 들어봤던 이야기들을 흡입력과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풀어내서 어렵지 않게 읽힌다. 몇 군데 밑줄 친 부분을 옮겨본다.
- 개신교 내부에서 서북계가 행사하던 패권은 산업화의 흐름과 함께 새롭게 부상하던 영남 출신의 개신교도들이 차지했다. (86면)
- 중산층은 한남 슈퍼 체인과 8학군과 현대 포니와 대형교회의 호위 속에서 새로운 일상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 (98면)
- 배울 만큼 배운 대졸 사무직 종사자들은 지난 시절 독재 권력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양도하고 그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156면)
- 대형 마트의 카트는 맘춰 서 있을 수는 있지만 질주할 수는 없다. (2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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