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산행
Posted 2010. 8. 15. 00:1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
태풍의 여파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온다. 토요일 아침에도 한 차례 시원하게 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쨍하다. 로즈매리는 점심을 차린 후 대학동문합창단 연습이 있어 나갔고,
집은 더웠다. <동이> 본방을 보느라 요즘 한창 재미있다는 <자이안트>를 볼 수 없어
재방 두편 때린 후 집을 나섰다.
애니고 앞 사거리에선 정면으론 검단산이, 왼쪽으론 예봉산 자락이 보인다. 둘 다
지붕에 구름을 얹고 있어 어서오라고 손짓한다.
등산로 초입은 땅이 질다. 10분 정도 이런 길을 지나면 돌길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본격적인 등산로 입구엔 라벤더가 한 무더기 피어 있다.
덥진 않았지만 일기가 안 좋아 토요일 오후인데도 등산객은 평일 수준이다. 곱돌 약수터에
올라 찬물로 세수를 하고, 벤치에 앉아 목을 축이는데 갑자기 세찬 비가 뿌려대기 시작한다.
저 아래로 미사리 조정경기장이 선명하게 보여야 하는데, 산 아래 아파트 단지도 안 보인다.
더 올라갈까 내려갈까를 잠깐 고민하다가 모처럼 잡은 우중산행을 놓칠 수 없어 배낭
밑에서 레인 커버를 꺼내 배낭을 둘러싸고 우산을 펴서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엔 헬기 착륙장이 있는데, 나처럼 천천히 올라가는 이들도 있지만,
팔각정 아래서 잠시 비를 피하기도 한다.
가만히 보니 우중산행도 여러 유형이 있었다. 레인 커버를 씌우고 우산을 꺼내든 사람,
우비를 입은 사람, 판초를 입은 사람, 그리고 그냥 비를 쫄딱 맞고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정상에 이르는 헐떡고개는 평소 같으면 땀이 범벅이겠지만, 비를 맞으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니 힘든 줄 모르겠다. 정상에 오르니 두세 사람이 등정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뿐 북적거릴 시간인데도 너무나 허허롭다.
비는 안개를 몰고와 평소 같으면 사방으로 보일 산들은 커녕 두물머리도 안 보인다.
벤치도 젖어 있고, 딱히 쉴 필요도 없으므로 바로 내려오는데, 이런! 비가 거짓말처럼
딱 그친다. 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올라오고, 물안개가 걷히면서 말끔히
씻긴 산길 하산의 즐거움은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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