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한 시간쯤 뒤에 하는 모임 사이에 시간이 비어 길 건너에 있는 DDP 부근을 둘러봤다. 중고등학교, 대학 다닐 때도 야구장이었고, 프로야구도 잠실 구장이 생기기 전엔 한동안 여기서 열려 여러 번 갔는데, 이제는 옛 모습은 찾을 수 없고 공공 건축물이 들어선지 오래다. 

DDP로 바뀐 뒤에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것 같긴 한데, 옛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들에겐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마침 야외에 <페이스 아틀리에>란 관객 참여향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미리 그려놓은 얼굴 형태에 각자 마커로 그리고 칠하게 하는 프로젝트였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사람도 많지 않아 그 중 하나에 그려볼까 싶었지만, 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고, 행사 취지도 충분히 숙지하지 않았고, 시간 여유도 많지 않아 그냥 잠깐 서서 바라보다가 다른 전시들 구경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섰다. 모처럼 재밌어 보이고 해볼 만한 찬스였는데, 약간의 소심함과 쑥스러움과 주저하는 전형적인 I 스타일에, 시도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는데 그쳤다. 

9월 마지막날 저녁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숭실OB남성합창단 정기연주회에 다냐왔다. 3주 전 저녁 교회 수요예베에도 초청돼 룩셈부르크의 19세기 후반 작곡가 로랑 메나제(Laurent Menager)의 미사곡 20번을 한국 초연으로 들려준 바 있는데, 같은 곡을 1부에서 들려주고, 인터미션 후엔 슈베르트와 흑인영가 등을 연주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남성합창단의 존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최승한 장로님이 지휘자로 계셔 교회 연주와 정기연주회까지 연이어 감상할 수 있었다. 고교 OB합창단으로는 최상급의 하모니를 들려주고, 솔리스트들도 실력이 있어서 귀가 호강했다. 

프로그램북을 보다가 단원 명단에 아내가 고등부 교사로 있을 때 학생이었던 친구가 있길래(나도 안다) 끝나고 40여년 만에 얼굴이라도 볼까 했는데, 로비가 워낙 붐벼 만나진 못하고 왔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최 장로님의 연결로 이튿날 통화를 할 수 있었고, 뜻밖에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맨드라미를 봤다. 어렸을 땐 많이 봤지만 한동안 동네에선 별로 안 보였는데, 아파트 옆 라인 1층 주민이 내놓고 가르는 화분과 짜투리땅에 심은 화초들(7/17/25) 가운데 꽃이 핀 것이다. 벌써 두 주는 된 것 같은데, 선명하고 빠알간 꽃이 매일 지날 때마다 반가이 눈인사를 해 온다. 

맨드라미 철인지 집에서 시청과 덕풍천 가는 길에 있는 성당 앞에서도 보였다. 그 중 하나는 90도로 꺾여 기역 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생긴 게 꼭 닭벼슬이다. 꽃이 이렇게 수그리거나 기울어져서 피면 꽃 윗부분만 보다가 아랫 부분까지 보게 된다. 그냥 봐선 같은 꽃이 맞나 싶을 정도다. 

맨드라미는 우리말인지 영어안지 헷갈려 찾아보니, 뜻밖에도 '만다라'라 불리던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고 한다. 닭벼슬처럼 생긴 대로 cockscomb이라 이름 붙인 영어가 흥미로운데, 성당 앞에 핀 건 꼭 그렇게 생겼다. 이름이야 어떻든, 이 계절에 활짝 펴서 매일 만날 수 있어 그저 좋다.

7월에 이어 2차 민생쿠폰이 발급됐다. 1차 때처럼 간단히 앱으로 신청해 쓸 수도 있지만, 주민센터에서 신청한 후 지역화폐로 발급받으면 어떨까 해서 2층 회의실로 올라갔더니, 번호표를 받고 대기중인 인원이 꽤 됐다. 이왕 온 거 기다리기로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발급 데스크엔 3-4명이, 기다리는 인원은 4, 50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대체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는데, 짐작컨대 태반은 스마트폰으로 신청하는 게 익숙하지 않거나, 그냥 이렇게 면대면으로 신청하고 발급 받는 게 편한 분들로 보였다. 40여분을 기다렸다가 내 순서가 되어 운전면허증을 보여주고 선불 카드로도 받을 수 있었지만, 지역화폐인 '하머니' 카드를 발급 받았다.

11월까지 다 쓰면 지역화폐 앱으로 충전할 때 약간의 인센티브가 주어지는데, 진작부터 동네 식당이나 시장 갈 일 있을 때 사용할까 하던 지역화폐다. 다음날 아침 10만원이 충전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1차 쿠폰은 식당 두 번, 편의점에서 마티스 그림과 콜라보한 와인 등에 잘 썼는데, 이번 건 시장에서 주로 쓰려 한다. 잊을만해지면 한 번 더 주면 좋겠다.^^ 

새벽녘에 잠이 깨서 부엌쪽 베란다에 서니 예봉산 일대가 온통 안개 투성이다. 간만에 안갯속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 산곡천 산책로에 들어서니 시계가 백 미터도 안 되는 뿌연 길이 계속됐지만, 다행히 두터운 안개는 아니었다. 한강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니, 강 건너 산은 커녕 팔당대교 교각도 안개에 싸여 1/3 정도만 보였다.
 
30여분 뒤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오니 그새 안개가 많이 걷혀 팔당대교는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최악의 안개는 25년 전쯤 안성에 있는 수양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였는데, 밤 10시쯤 구불구불한 길을 상향등까지 켜고 엉금엉금 기듯 내려오다가 도무지 그 두터움이 걷힐 기미가 안 보여 결국 차를 돌려 잠을 자고 새벽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후 산길에서 이런저런 안개와 물안개를 만나도 그날 만큼은 아니었고,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모험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어서 안전하게 다니느라 이렇다 할 기상 악조건을 경험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평상시 집 근처에서 이런 풍경을 접하는 건 희귀하진 않아도 흔한 일도 아니어서 불현듯 걸어가고픈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