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앞 성공회 서울성당
Posted 2015. 12. 27. 00:00, Filed under: I'm churching/교회 나들이
70년대 초반 중학생 시절 다니게 되면서 모교회가 된 곳이 광화문에 있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 봤을 곳인데도 이상하게 안 가 본 곳이 시청 건너편에 있는 성공회 서울성당이다.
당시 광화문엔 내가 다니던 중소형 합동측 N교회와 함께 통합측 S교회와 감리교의 J교회가
있었는데, 둘 다 당시로선 대형교회 축에 속했다. 하필이면 가장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바람에 성공회는 거의 가톨릭과 동급으로 취급해 마당 말고는 들어가볼 엄두도 못 냈다.
어설픈 교회색 핑계를 대고 있지만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련된 외관으로 눈길을 끄는 성당 안엔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다 못해 다른 도시 가서 유서 깊은
성당이나 사찰을 둘러보는 관심과 성의도 없었던 게 분명하다. 다른 걸 떠나서 예전엔 존 스토트
(J. Stott), 지금은 톰 라이트(N. T. Wright)란 걸출한 책 선생들의 교회인데도 막상 이 땅의
본부 교회를 구경삼아라도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니 참 게을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청앞 집회가 있던 12월 첫 토요일에 처음으로, 그것도 뒷자리까지만 빼꼼
들어가 봤다. 자세히 둘러보진 못했지만 따뜻한 인상을 받았고, 조만간 주일예배, 아니 미사도
한 번 참여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칫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팔짱을 낀 교회 나들이
차원밖에 안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뜻밖의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맛보면 좋겠다.
건축양식이나 지난 1890년 전래 이후 125년 간 이 땅에 자리 잡으면서 해 온 일들은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이날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밖에 내건 배너 4개였다. 성공회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25년이 됐다는 걸 자임하면서 네 개의 키워드로 자신들의 정체성이랄까 사역 목표를
드러내는 멋진 Mission Statement였다. 어떤 순서(priotity)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과 하느님을
사이에 두고 자연과 화해를 동급으로 천명하고 있다는 게 신선했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동안 내가 다녔던 교회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진부한 미사여구를 낡은 레코드마냥
틀어대기 일쑤였고, 괜히 전투적이거나 공허해 보이는 추상적인 구호를 남발해 온 게 사실이다.
겉멋내는 기름기와 충분히 동의되지 않는 군더더기 다 걷어낸 심플한 단어 몇 개만으로도
이들이 무얼 추구하고 무얼 배격하는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그날 받아 온 20여 쪽 짜리 안내 책자의 문구였다. 타이틀로
내세운 <깊은 영성, 넉넉한 환대>는 교회의 존재 의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문자 그대로 교회됨의 정수를 재천명하는 것 같았다. 환대가 부족하거나 사라져 가는 현대
주류 교회들이 성공회에서 한 수 배워야 할 듯 싶었다. 성공회의 신조랄까 특성을 간추린
다섯 가지도 하나하나가 따뜻하면서 단아한 느낌을 전해 주면서 정말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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