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꺾였어도
Posted 2014. 2. 9.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동네산책
산에는 널린 게 나무들인지라 키가 아주 크다거나 둘레가 상당히 넓다거나 잎 모양새가 색다르다든지 해서 독특해 보이지 않는 한 나무 하나 하나에 눈길을 주기가 쉽지 않다. 산에서 나무는 나무 자체로서보다는 숲으로 존재하고, 그렇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겨울철엔 숲의 풍경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어 차라리 외면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 나무도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눈이 내리고 쌓이면서 보통 때완 다른 모습으로 서 있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몇 해 전 여름 태풍이 격렬하게 몰아닥쳤을 때 많은 나무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꺾인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남은 키가 1미터를 조금 넘는 볼품 없는 모양으로 경사면 비스듬한 곳에 겨우 서 있었다.
그냥 그렇게 두고 보기가 안스러웠던 것일까. 그 전날 내린 눈이 나무를 세로로 반쯤 덮어 주었다. 아니, 가려 주었다고 해야겠다. 눈은 별 생각 없이 산에 있는 나무들마다 하얀 색을 맘껏 선사해 주었는데, 이 나무에겐 제법 화려한 치장이 됐다. 그 동안 아무런 존재감 없이 겨우 서 있기만 하던 나무가 일순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주위에 온전히 서 있는 나무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비록 꺾였자만 묵묵히 견디고 버티고 자리를 지키다 보니 이런 날도 생긴 것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부러울 것 없고, 오히려 주위의 키 큰 나무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됐다. 비록 하루 이틀 뒤 눈이 녹아내리면 다시 예전의 부러지고 꺾인 나무로 되돌아가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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