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봉에 오르다
Posted 2013. 12. 10. 00:00, Filed under: I'm wandering/I'm a pedestrian
지난주에 눈길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가 2/3 지점쯤에서 돌아와야 했던 용문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백운봉에 대한 아쉬움을 다스리고 설레임을 충족시키고자 토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아이젠에 두꺼운 장갑에 보온병에 꽃차까지 타서 집을 나서 팔당대교를 건너 35분 걸려 사나사 앞에 도착한 게 9시 50분,
바로 시작되는 등산로에 걸음을 남기며 올라가는데, 지난주와는 풍경이 달랐다. 눈길이 다 사라지고 12월 이맘때 겨울산 풍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실 지난주에 이 정도를 예상하고 가볍게 왔다가 바로 눈길을 만나 시간도 걸리고 끝까지 가지 못해 재차 도전한 건데, 산이 나를 부르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하면서 초겨울산의 스산한 풍경을 받아들였다.
사나사 계곡으로 해서 4부 능선, 6부 능선을 지나 지난주에 발길을 돌렸던 8부 능선쯤에서 한 번 웃어주고 계속 올라가자 눈 기운이 남아 있는 능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능선 정상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이르니 용문산 주봉들인 장군봉과 정상으로 가는 길과 내가 가려는 백운봉 길이 나뉜다. 오늘은 오른쪽 길로 가지만, 내년 봄이 되면 왼쪽 길로 접어들어 장군봉과 용문산 정상도 가 보고 싶어졌다.
백운봉까진 650m 남았다는데, 다른 산 같으면 길게 펼쳐진 능선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바로 정상부가 나올만한 거리였지만, 한국의 마테호른이라 불리는 백운봉까지의 650m는 조금 달랐다. 글쎄, 체감하는 거리는 1 km가 훨씬 넘었는데, 멀쩡하던 날씨가 눈발을 뿌리기 시작하고, 누가 능선 아니랄까봐 골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겨울엔 제법 매서울 것 같았다.
능선이 끝나자 로프를 설치한 경사가 제법 있는 오르막이 시작됐고, 철계단길로 이어졌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으려 로프를 꽉 붙잡고 오르려니 안 쓰던 팔근육이 당기는 느낌이 온다. 약간의 스릴이 느껴졌다. 근데, 한두 개쯤 되겠거니 생각한 철계단이 네 개나 됐다. 그냥 오르기엔 험하고 위험한 구간이었나 보다. 역시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능선까지 한 시간 정도 올라온 길과는 전혀 다른 눈얼음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이 지척일 게란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계단에 쌓인 눈이 장난이 아니었다. 먼저 오르내린 이들이 디딜 곳을 만들어놨지만, 이따 내려올 땐 아이젠을 껴야 할 정도로 얼어 있고 미끄러웠다.
사나사를 출발해 한 시간 40여분 만에 백운봉 정상에 올라섰다. 커다란 돌을 깎아 이름과 높이를 새겨놓았는데, 9백 미터대 산은 요 근래 처음 오른 것 같다. 카톡으로도 인증샷을 날리니 집에 있던 아내와 g가 축하 메시지를 바로 보내왔다.
정상부는 서너 방향에서 올라온 이들이 십여 명 보였는데, 용문산 자연휴양림 방면에서 올라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바위도 있고, 적당한 크기의 전망 데크도 마련돼 있어 사진들을 찍은 다음에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타 먹는 사람도 있고, 비교적 젊은 등산객들은 카톡 메시지를 날리고들 있었다.
짙은 안개가 껴서 아래는 보이지 않았는데, 옆에 있는 분께 물어보니 맑은 날엔 용문산 줄기들이 장관이며, 바로 옆에 있는 유명산은 물론 청계산, 운길산, 예봉산에 한강 건너 우리 동네에 있는 검단산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하긴 검단산에서도 맑은 날엔 이곳 백운봉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산에서보다 조금 길게 10여 분 머물다가 날이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려 하산길에 올랐다. 막 눈이 와서인지 상고대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산은 공평하다. 주변 산세를 조망하는 즐거움은 놓쳤지만, 대신에 올겨울 첫 상고대를 원없이 보여 주었다. 그러니 맑은 날에도 산에 와야 하고, 흐린 날에도 역시 와야 하는 것이다.^^
아이젠을 신고 장갑을 끼니 미끄럽고 얼어붙은 계단길을 내려가는 게 든든하다. 아까 왔던 능선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주위가 온통 희뿌옇기만 하다. 올라오면서 봤던 풍경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데,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나무 가지 위에 핀 눈꽃들을 구경해 주었다.
철계단들과 로프 길을 내려오니 아까 왔던 저쪽은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능선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 정상에선 아무 것도 안 보여주면서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곳을 즐기라 하더니만, 전망을 포기하고 내려오니 안개를 슬슬 물러가게 하는 밉지 않은 심술을 부린다.
능선을 지나 하산길에 문득 뒤돌아보자 다시 언제 흐린 적이 있었느냐면서 맑은 하늘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30여분 사이에 이 무슨 조화인지. 나보다 한 시간쯤 늦게 올라온 이들은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행운을 누렸을 것 같은데, 높은 산 정상 날씨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그저 하나를 놓치면 다른 하나를 얻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자주 다녀야 산이 보여주는 이런저런 매력을 고루 누릴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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